참 친해지기도 힘들고 소통도 요원한 것이 환자와 의사 관계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차례가 돼 진료실에 들어섰을 때도 의사들은 대체로 모니터를 강력하게 응시한다. 살짝 훔쳐본 적이 있었는데, 수많은 수치와 그래프, 테이블, 그리고 아마 내 몸속 어딘가로 생각되는 사진이 게시돼 있었다. 내 몸 이야기지만, 나로선 도무지 알 도리가 없는 그 정보들을 뚫어져라 분석 중인 사람, 그가 바로 의사였던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환자들은, 사실 그 아우라에 압도돼 웬만하면 침묵을 지키는 편이다. 그래야함을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다. 마침내 의사의 설명이 시작되면, 현재 상태와 치료 가능성, 진행해야 하는 처치 등이 논리적으로 ‘우르르’ 전달된다. 과학의 소중한 결과물일 것이며, 의사는 각종 수치와 경험적 데이터 그리고 고도의 훈련에 의해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환자의 다음 스텝을 알려준다. 근거도, 설명도, 정보를 전달하는 주체도 지극히 ‘이과’ 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연하기도 하고, 그런 방식이 합리적이라는 판단도 든다.
하지만 이처럼 ‘과학적이며 이과적인’ 설명에 비해, 환자들은 그의 원래 직업이나 분야와는 상관없이 진료실 내에서는 매우 감정적이고 초조한 심리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의사가 활용한 이성적 정보와 그에 걸 맞는 화법, 하지만 환자들은 의사의 과학적 설명을 들은 다음에도, “그래서, 위험한가요, 아닌가요?” “글쎄 뭐... 문제가 없다는 얘기네요?” “가망이 있다는 건지, 아니면...?” 등 마치 “예스 or 노”를 단순하게 찍어 달라는 듯 지극히 비과학적 화법을 수행하는 일이 많지 않을까 싶다. 의사의 그 어떤 설명과도 상관없이, 결국 환자는 둘 중 하나로 좁히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뜻이다.
이 같은 소통의 난감함은, 의사들은 치료의 가능성에 대한 퍼센트가 숫자의 가짓수만큼이나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환자들은 어쨌든 해답을 딸랑 두 가지로 좁혀서 들어야만 속이 시원한 스타일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무섭게 상이한 사고방식과 소통의 스타일은 앞으로도 그 고유의 스타일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각자에겐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가장 친해지고 공존해야 하는 관계가 환자와 의사 관계 아닌가. 방법을 좀 찾아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백세시대니 역사상 최고 수명이니 살아갈 날은 길어지는데, 의사는 환자를 환자는 의사를 볼 일은 앞으로 더욱 자주일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어차피 사랑해야 하는 관계,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는 작업이 먼저라고 믿는다. 환자는, 가뜩이나 엄청난 수의 환자를 상대해야만 버틸 수 있는 우리나라 의사들의 현실도 십분 이해해야 하며, 극도로 훈련된 과학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화법에 대해서도 공감수준을 높여야 할 것이다. 선택했고, 만났으면,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의사들 또한,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낮은 이해도만 갖는 다소 ‘안쓰러울 수 있는’ 우리 환자들, 아무리 퍼센트를 전달해도 결국엔 ‘둘 중 하나’로 투박하게 물어보는 우리들에 대한 역지사지도 요청 드리는 바이다. 어차피 헤어질 수 없다면, 서로 보듬고 노력해야 하는 게 맞다.
유현재 서강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한국 헬스커뮤니케이션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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