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집 공간 사람’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연재합니다.
빌딩숲 속세(회사)에서 탈출해 15분이면 산이 보이는 ‘나만의 요새’(집)에 도착한다.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리고 스피커의 볼륨을 올린다. 갓 지은 밥과 간단한 반찬을 준비해 조촐하지만 제대로 갖춘 밥상을 차린다. 은은한 조명 아래 TV와 마주한 식탁에 앉아 ‘고독한 미식가’를 틀고 식사한다. 와인도 한잔 곁들인다. 식사 후에는 최신 게임을 하거나 동네 산책을 하고, 늦은 밤에는 다락에서 영화를 감상한다.
현실은 삼포세대(사회경제적 상황으로 연애ㆍ결혼ㆍ출산을 포기한 세대)일지언정 ‘전원 속 나만의 요새’는 30대 1인 가구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꿨을 법한 로망이다. 원룸과 오피스텔을 전전하던 30대 미혼의 회사원이 전원주택을 지어 이 로망을 실현했다.
오피스텔에서 탈출한 30대 싱글남이 지은 전원주택은
건축주인 김동욱(34)씨에게 집은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곳’이었다. 건축사무소에서 설계 업무를 담당하는 김씨는 야근과 출장이 잦았다. 자취 경력만 10년 이상인 그는 밤늦게 들어갔다가 아침 일찍 부랴부랴 나왔고, 밖에서 대부분의 식사를 해결했다. 주말이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인스턴트 식품으로 끼니를 때웠다. 한 층에만 96가구가 살던 오피스텔은 상하좌우를 막론하고 소란했다. 33㎡(10평)의 좁은 공간에서 그는 좀체 쉬지 못했다. 월세는 매번 오르는데, 삶의 질은 나날이 떨어졌다. 최근 만난 김씨는 “혼자 사는 30대의 주거 선택지는 원룸이나 오피스텔, 빌라이고, 상황이 좀 나으면 아파트인데 이런 공간은 모두 공동주거”라며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은데 집에서조차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이고 잠도 푹 자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여름 경기 성남에 있는 회사와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용인시 고기동에 두 채의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발견했다. 528㎡(160평) 필지를 쪼개 김씨가 252㎡(76평)만 샀다. 전원주택치곤 작지만 혼자 살기에는 적당했다. 땅값이 4억원에 건축비용으로 2억원이 들었다. 절반이 대출이고 이자 비용은 매달 내던 월세(60만원)와 비슷하다. 김씨는 “주거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근처 아파트 시세보다는 낮다”며 “주거 안정성을 고려한 미래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집 공사는 단 두 달 만에 끝났다. 설계와 시공을 맡은 케이엠그룹의 이동영 대표는 “퇴직한 노부부나 아이가 있는 대가족 등이 전원주택을 선호한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1인 가구, 신혼부부 등 청년층의 소형 전원주택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는 두 집을 한 집처럼 붙인 ‘땅콩집’이 유행이었다. 김씨처럼 땅을 반으로 쪼개 완전히 분리된 집 두 채를 짓는 게 요즘 대세다. 건축 비용을 줄이고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2층 건물에 다락까지 있는 김씨 주택의 건축면적은 49㎡(15평)이고, 연면적은 98㎡(30평)다.
주택 관리 돕는 목조 주택
김씨가 주택으로 옮기면서 가장 우려한 것은 집 관리였다. 경비원 없이 관리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건축가와 상의해 집의 유지 관리 기능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우선 목조로 집의 뼈대를 세웠다. 소나무와 전나무 등 침엽수를 섞어 만든 목조 골조는 집의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해준다. 건조할 때는 수분을 토해내고, 장마철에는 수분을 머금는다. 목조 주택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우려도 편견이다. 화재가 발생하면 벽지를 비롯한 내장재 때문에 유독 가스가 발생할 뿐, 목조에서는 유독 가스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재 강도가 높아 화재가 나도 오래 버틸 수 있다. 불이 붙어도 속까지는 타지 않는 숯의 원리를 생각하면 된다. 내구성도 강점이다. 긴 직육면체로 나무를 잘라 깍지 끼우듯 골조를 만들면 지진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콘크리트 주택보다는 층간 소음이 큰 게 단점으로 꼽히지만, 단독주택이라면 큰 문제 없다.
집 외관 디자인에는 힘을 뺐다. 외벽에 시멘트를 발라 미장한 뒤, 오염에 강한 회색 고벽돌(오래된 벽돌)을 붙였다. 테두리와 지붕은 컬러 강판으로 마감해 벌레가 침투하거나 빗물이 안으로 새는 것을 막았다. 이 대표는 “집 색상이나 디자인을 튀게 하면 이웃과 갈등을 빚을 수 있을 것 같아 동네 분위기에 맞춰 회색으로 점잖은 느낌을 냈다”고 말했다.
바닥부터 다락까지…싱글남의 로망 실현하는 공간
집 안으로 들어가 보자. 점잖은 느낌이 반전된다. 경쾌한 느낌의 V자형 줄무늬(헤링본 패턴) 마루를 깔고 6단계로 조절되는 간접조명으로 시시각각 분위기가 달라진다. 네온사인 시계, 스피커와 게임용 레이싱 의자, LP판과 턴테이블, 스테인리스 소형 가전기기, 회색의 모던 소파 등 소품들도 건축주의 발랄한 성격을 보여 준다. 1층 주방과 거실은 일체형으로 설계됐다. 가벽이나 문으로 공간을 구획하면 더 좁아 보이고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층고가 3.5m로 일반적인 아파트(2.4m)보다 1m 이상 높다. 거실 창은 남동향으로 내 햇빛을 충분히 들이고 풍경을 한눈에 담는다. 바로 앞에 다른 집이 들어설 것에 대비해 앞쪽으로는 창을 내지 않았다.
주방과 거실, 화장실이 있는 1층이 활동 공간이라면, 2층은 침실과 손님방, 화장실로 구성된 휴식 공간이다. 이 대표는 “공간이 좁지만 여러 층을 쓰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동선을 짜려고 했다. 밤늦게 들어오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가 간단히 씻고 바로 쉴 수 있게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침실 안에는 세면대가 딸린 드레스룸을 뒀다. 손님방은 이후 김씨가 가정을 꾸리게 될 것에 대비한 공간이기도 하다.
1,2층이 실용적인 공간이라면 3층 다락은 그야말로 로망의 공간이다. 사선으로 비스듬한 다락의 평균 높이는 1.8m. 빔 프로젝터와 테이블, 안락한 방석의자까지 갖춰 ‘나만의 영화관’을 만들었다. 다락엔 가로 세로 4x2m의 작은 테라스가 딸려 있다. 김씨가 가장 자랑하는 공간이다. “다락은 전원주택의 로망이잖아요. 비 올 땐 빗소리도 들리고 테라스에서 별도 보고 달도 보고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심지어 집안에서도 은둔할 수 있어요.”
로망은 현실이 됐을 때 힘을 잃는 것은 아닐까. 살아 보면 불편하거나 외롭진 않을까. 적막함이 감도는 이곳에서 이웃 노부부의 친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나 사려고 해도 밖으로 나가야 하고, 친구나 지인들 만나기도 힘들어요. 그런데 그래서 삶이 달라졌어요. 꼼꼼하고 알뜰하게 장을 보고, 정성스레 식탁을 차리고, 지인들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고 더 배려하게 됐어요. 불편하지만 삶의 질은 좋아졌어요. 아무리 삼포세대라지만 인간답게 살아야 되잖아요.”
용인=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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