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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소방관 6명 집어삼킨 2001년 서울 홍제동의 어느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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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소방관 6명 집어삼킨 2001년 서울 홍제동의 어느 새벽

입력
2019.03.03 11:00
수정
2019.03.2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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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는 현상부터 근원까지 이야깃거리를 몽땅 끄집어 내고 싶은 <한국일보>의 멀티 플랫폼 스토리텔링 콘텐츠입니다. 텍스트, 비디오, 데이터 등등. 가능한 모든 도구로 사람과 사회, 역사와 현상을 연결지어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2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에 찾아 뵐게요.

◇지극히 평범한 날

18년 전 '전대미문'의 화재 참사가 벌어졌던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골목길. 당시 구조대원들은 25㎏이 넘는 장비를 짊어지고 이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갔다. 평온했던 지난 달 22일 오후, 여전히 비좁은 길 끝에서 한 주민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오리지너.
18년 전 '전대미문'의 화재 참사가 벌어졌던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골목길. 당시 구조대원들은 25㎏이 넘는 장비를 짊어지고 이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갔다. 평온했던 지난 달 22일 오후, 여전히 비좁은 길 끝에서 한 주민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오리지너.

2001년 3월 3일. 별다를 것 없는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한참 ‘핫’ 했던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관심법을 남발하며 사람을 죽여대는 궁예가 주인공 왕건보다 큰 존재감을 과시해 제작진을 당황케 했고, 한국의 대표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 1,000회 특집 방송이 있었습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늘어난 결식아동이 16만 명에 달했고, 보이스피싱의 원조 격인 텔레마케팅 사기가 신종 수법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청소년 게임중독 문제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전문가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나왔습니다. 일본 정부는 왜곡된 역사교과서 시정을 거부했고, 공공 부문 민영화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는 여론의 반발에 부딪쳤으며, 야당 총재는 민심 탐방이랍시고 수행원들을 대거 이끌고 지하철을 탔다가 “시민 불편하게 하지 말고 승용차 타고 다니라”는 질책을 받았던 일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른 날이었습니다. 늘 있어왔던 부조리는 부조리대로 그 자리에서 불편함을 만들었지만, 소소해도 소중한 일상이 여전히 이어지던 날이었습니다.

서울 서대문구와 은평구 일대를 관할하는 서울 서부소방서 소방관들에게도 그날은 봄을 앞둔 3월의 첫 주말 저녁이었죠. 출동이 없었던 밤이면 보통 그랬던 것처럼 오후 9시쯤 각자 운동을 하고 밤 11시쯤에는 휴게실에 옹기종기 모여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이 중 몇 사람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저녁 운동, 마지막 야식이 될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저녁이었죠. 5시간 후인 3월 4일 새벽 4시 11분, 이들 중 일부와 다른 소방관 9명은 건물 잔해 속에 묻혔습니다. 이 가운데 6명은 가족과 동료들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극의 날이었습니다.

◇운명의 장난, 새벽 4시 11분

그림 2[저작권 한국일보]
그림 2[저작권 한국일보]

시작은 주인집 아들이었습니다. 4일 새벽 2시 반쯤 1층에서 술 취한 남성의 목소리가 곤히 잠든 홍제동의 낡은 주택을 울립니다. 철근 기둥도 없이 벽돌과 블록으로 지었다가 다시 2층을 증축한, 34년 된 서대문구 홍제동의 빨간 벽돌집이었습니다.

“왜 나를 정신병원에 보냈느냐, 내가 정신병원에서 얼마나 맞았는지 아느냐.” 분을 이기지 못한 아들 최모(당시 32세)씨가 집주인인 어머니 선모씨에게 날선 원망을 퍼붔습니다. 아들에게 얼굴과 몸을 맞아 피를 흘리던 선씨는 2층에 세 들어 살던 김씨 부부 집으로 몸을 피합니다. 후에 김씨 부부는 당시 상황을 두고 “선씨와 아들이 또 싸우는구나 했다”고 회상합니다. 조현병을 앓던 최씨가 어머니를 폭행한 일은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습니다. 도망친 어머니를 찾지 못하자 격분한 최씨는 어머니 선씨의 방에 깔린 이불에 불을 지릅니다. 이불에서 가재도구로, 그리고 온 집안으로. 내부가 대부분 나무였던 낡은 집 곳곳으로 삽시간에 화염이 번졌습니다. 다행히 어머니 선씨와 그를 받아줬던 김씨 부부는 무사히 집을 빠져 나갔습니다.

◇녹번1소대와 2소대

[저작권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비슷한 시각, 서부소방서 지휘차량과 녹번1ㆍ2소대, 그리고 구조대는 모자의 불화가 있었던 홍제동이 아닌 은평구 녹번동 신고 현장으로 각각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녹번동은 오인 신고일 것 같다’는 의견이 오가던 오전 3시 48분. 출동하던 대원들에게 홍제동 화재 소식이 전달됩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진압계장은 녹번1소대는 그대로 녹번동 현장으로 가서 화재 여부를 확인토록 하고 녹번2소대를 비롯한 나머지는 홍제동 현장으로 보냅니다.

불이 난 집 앞에서는 어머니 선씨가 먼저 도착한 소방관들을 붙잡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건물 안에 있다.” 최고조로 타오른 불길은 2층 집을 휘감고 있었고 1, 2층 창문에선 화염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녹번 2소대는 불길을 잡기 위해 건물 내부로 들어갑니다. 현장에 있던 대원들이 걸쳤던 것은 국제기준에 맞는 120만원 상당의 방화복이 아닌 8만원짜리 방수복이었습니다. 진압 도중 뜨거워진 물이 튀었을 때 다치는 걸 방지하는 수준이었죠.

잠시 후 오전 4시 11분, 벽돌집이 순식간에 내려 앉았습니다. 녹번 1소대 박동규 소방장, 박상옥 소방교, 이승기 소방교가 안에 있었습니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건물 속에서 진화 작업을 벌이던 홍은소대의 김철홍 소방교와 강남길 소방사도 곁에 있었습니다. 김철홍 소방교는 오전 5시, 박동규 소방장과 박상옥 소방교는 오전 7시 30분이 훌쩍 넘어서 동료들 품에 안겼지만 영영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앞서 녹번동으로 가던 길에 갈라졌던 녹번1소대는 건물 붕괴 3분 전인 4시 8분, ‘홍제동 현장으로 합류하라’는 지시를 받고 방향을 틀었습니다. 도착한 시간은 4시 18분쯤이었습니다. 녹번 2소대 소방관들은 소방호스 대신, 동료를 꺼내기 위한 삽과 해머를 손에 들어야 했습니다.

◇구조대 1조, 2조

[저작권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현장 인명구조를 담당하는 구조대는 화재진압대인 녹번2소대와 거의 같은 시점에 홍제동 현장에 도착했지만 진입 경로는 달랐습니다. 폭 6m 남짓한 좁은 도로에는 주차 공간이 부족했던 주민들이 세워 둔 차들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동네 새마을금고 앞에 구조대 차량을 세우고 25㎏이 넘는 개인 장비를 짊어진 5명의 구조대는 160m 가량을 달려서 벽돌집 앞에 도착합니다.

아들이 안에 있다는 말을 들은 그들도 곧바로 움직입니다. 구조대 소대장 김기석 소방교가 1조인 장석찬ㆍ박준우 소방사와 함께 벽돌집의 안방과 아들 방을 살피러 진입했습니다. 그 사이 2조는 현관에 있던 도시가스 밸브를 차단합니다. 1차 수색 종료. 아들 최씨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씨가 “사람이 안에 있는데 왜 구하지 않느냐”고 했고 소대장과 1조는 다시 사방이 불꽃으로 뒤덮인 건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다른 출입구 주변으로 구조를 시도하라는 소대장 지시를 받은 2조는 좁은 담장을 끼고 건물 좌측 뒤쪽 출입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2조를 맡았던 권영철 소방사는 당시 “등골이 오싹했다”고 말했습니다. 2인 1조로 움직이기로 한 신참 이민호 소방사의 모습이 안 보였기 때문이었죠. 처음에는 ‘이 XX 봐라, 도망갔나? 나가면 가만 안 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뒤따라 오던 이 소방사는 무너져 내린 잔해에 깔려 있었습니다. 이 소방사는 곁에 있던 다른 대원들로부터 구조됐지만, 앞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던 소대장과 구조대 1조 대원 2명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소방 호스 12개

[저작권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오전 3시 59분, 3번째로 현장에 도착한 연희소대도 골목길에 주차된 차량들에 막혔습니다. 화재 진압차량이 멈춘 곳과 현장까지의 거리는 150m 가량. 연희소대 대원들은 굽은 골목과 차량을 피해 물을 쏘기 위해 1개당 15m 남짓한 소방 호스 12개를 이어 붙여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불길은 더 거세집니다. 가까스로 길다란 호스를 들고 물을 뿜던 중 건물이 무너집니다. 날아 온 담장 블록에 맞은 곽용규 소방장과 이문형 소방장, 심미현 소방교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이들은 다시 일어나 앞서 잔해에 깔린 강남길 소방사와 이민호 소방사를 함께 구조합니다.

오전 5시 47분, 해가 뜨지도 않은 홍제동 하늘에 굵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합니다. 영하 0.3도, 초속 4m의 서남풍에 습도 60%. 흔한 꽃샘 추위였지만 이날 홍제동이 맞이한 아침 풍경은 어느 날보다 참혹했습니다. 마지막 대원이 싸늘하게 식은 채 들것에 실려 나온 시간은 오전 7시 57분, 이어 구조 작전은 오전 9시 28분에 종료됩니다.

9시 28분은 벽돌집 주인 아들 최씨가 불길이 치솟기 전 현장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시점이었습니다. 최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뒤 홧김에 불을 질렀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는 이후 현주건조물방화 및 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심신미약 등이 인정돼 징역 5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고 후 많은 생각들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꼬리를 물었습니다. ‘어머니 선씨가 아들이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붕괴 위험이 높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녹번동 오인 신고가 없어서 더 많은 대원이 조기에 도착했더라면, 불법 주차 차량이 적었더라면, 제대로 된 안전장비가 있었더라면.’

◇현장의 공포

2001년 3월 홍제동 화재 현장에 출동했었던 권영철 서대문소방서 구조1대장. [저작권 한국일보]
2001년 3월 홍제동 화재 현장에 출동했었던 권영철 서대문소방서 구조1대장. [저작권 한국일보]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서대문소방서 구조대 휴게실. 2001년 화재 당시 현장에 있었던 권영철 구조1대장의 목소리는 담담했습니다. 그날의 홍제동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후 몇 가지를 더 물었습니다.

오리지너 “저희로서는 감사합니다만, 홍제동 사고를 다시 떠올리기 힘드실 텐데 인터뷰를 승낙하신 이유가 뭔가요?”

권영철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못 느껴요. 한 다리만 걸치면 모든 게 와전되거든요. 도시가스 배관이 어떻다, 불꽃이 어떻다. 사고 후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전부 (잘잘못을 따지면서) 말들이 너무 많았어요. 현장에서 다친 사람들은 말도 못했어요. 다리가 골절이 되고 허리를 다쳐도 순직한 분이 많아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나설 수가 없었거든요. 그랬던 게 너무 안타까워서 이번 인터뷰에서는 직접 말하고 싶었어요.”

오리지너 “교통사고를 비롯해 많은 구조를 나가시는데 화재 현장만의 어려움이 있나요?”

권영철 “군대 생활도 오래 했지만, 제일 무서운 게 화재 현장이에요. 뭐라고 하는 분도 계시지만 어떤 때는 아들 대신 군 생활하는 게 낫겠다 싶을 때도 있어요. (그는 특전사 출신이다) 소방관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과 사를 왔다 갔다 해요. 특히 화재 현장은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교통사고, 기계사고, 붕괴 사고… 온갖 사고 구조를 나가서 피해자의 신체가 훼손된 경우도 많이 봤지만 화재 현장은 또 달라요. 구조 대상자 위치를 모르면 중장비를 쓸 수도 없고, 건물 상태를 한 번에 파악할 수도 없고, 상황이 갑자기 어떻게 변할지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아요.”

그래서인지 그는 24시간 근무를 마치고도 집에 안 가고 허구한 날 동료와 당구를 치거나 술을 마시는 소방관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겪어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현장의 공포는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누를 수 있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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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 “사고 후에 어떻게 지내셨나요?”

권영철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6개월 이상을 술로만 지냈어요. 그 때는 현장 나갔던 소방관 (심리를) 치료하는 시설도 없었어요. 사고 직후 본부에서 감찰이다 뭐다 하면서 보고서를 써 내라는데 도저히 일지를 못쓰겠는 거에요. ‘내가 말로 하면 대신 글로 옮겨 줄 수 없겠냐’고도 해봤는데 위에서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반응이었어요. 홍제동 때는 결혼한 지 3년밖에 안 됐을 때였는데 그만두려고도 해 봤지만 결국 어린 애들 때문에 (사표 쓸) 시기를 놓쳐서 지금도 다니네요. 하하하”

.오리지너 “그 후에도 위험한 상황이 있었나요?”

권영철 “2008년 8월 은평구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가 있었어요. 그 때도 건물이 무너져서 직원 3명이 순직했어요. 제가 맡은 구조대는 다 피신을 시켰는데 화재진압대는… 무전으로 피해야 한다고 했는데… “

오리지너 “저도 그렇지만 홍제동처럼 희생이 많았던 경우 말고는 소방관의 순직 사고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건 유가족들이 홍제동 사고 유가족과 소원하다는 말도 나오는 것 같아요.”

권영철 “그렇죠, 오로지 홍제동만. 제일 안타까운 게 그런 부분이에요. 순직이 1명이든 2명이든 똑같은 순직이에요.”

오리지너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권영철 “있으면 진짜 써 줄랍니까?”

오리지너 “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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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철 “많은 게 나아졌지만, 인원이 줄었어요. 당시에는 24시간 맞교대로 격일 근무였는데 그게 너무 힘이 드니까 3교대로 바꿨어요. 그런데 인원을 그대로 두고 2개조를 3개 조로 나눠서 예전엔 9명 한 팀인데 지금은 7명인 거죠. 이게 정말 차이가 큰 게, 현장에서 차량과 장비 지원 인원을 빼면 실제 구조 인원은 5명밖에 안돼요. 2인 1조로 움직일 때 현장에서 2개조와 3개조의 차이는 구조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달라요.”

이날 구조대에 출근한 팀원이 7명이 아니라 6명인 이유를 묻자 그는 “3명이 못 나와서 급하게 다른 팀에 초과 근무를 해 달라고 사정을 해서 2명만 겨우 채웠어요.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가족 여행 가는 대원, 조부상을 당한 대원, 아이 졸업식을 간다는 대원들인데 제가 막을 수가 없잖아요”라고 답했습니다. 현재는 5명 탑승 정원인 장비 차에 빈자리를 남긴 채 운전자 혼자만 타고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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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2014년 사이 순직한 소방관은 총 33명이었습니다. 많은 장비가 보강됐다고는 하지만 홍제동 사건이 있었던 2000년대 초와 비교했을 때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더 충격적인 부분은 그 5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방관의 숫자가 35명으로, 순직자를 앞질렀다는 대목입니다. 우울증 등 신변 비관이 19건으로 가장 많았고, 가정불화가 10건으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2014년 3만 7,093명의 소방공무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39%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증, 알코올사용장애, 수면장애 등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1년 3월 6일 서울시청 뒷마당에서 열린 영결식에 참석한 한 소방관은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석을 떨다가 며칠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일이 이번에는 달라질까요?” 그가 그 날 떠나 보낸 김철홍 소방관의 책상에는 ‘소방관의 기도’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라는 문구로 시작합니다.

2019년 3월 4일은 홍제동 참사 18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이상, ‘오리지너’였습니다.

조원일 기자 callme11@hankookilbo.com

김창선 PD changsun91@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최한솔 인턴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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