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52>김영삼의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정치학은 법학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사회과학이다. 인류가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다루는 정치적 상상력과 문법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일차적인 조건을 이뤄왔다. 공자와 플라톤의 사상에서 볼 수 있듯 정치에 대한 담론이 아주 오랜 역사를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이가 정치가다. 어느 사회이든 정치가 중요하듯 정치가 역시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주목할 정치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김영삼이다. 그는 평생 경쟁자였던 김대중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60~70년에는 박정희에 맞섰고, 1980년대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한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구심을 이뤘으며, 1992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돼 ‘김영삼 시대’를 열었다. 사회적 측면에서 민주화 시대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시작됐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민주화 시대는 김영삼 시대에 본격화됐다.
김영삼 시대는 명암이 아주 뚜렷한 시대였다. 한편에선 금융실명제 실시에서 볼 수 있듯 거침없는 개혁이 진행됐던 반면, 다른 한편에선 외환위기에서 볼 수 있듯 그늘 또한 매우 짙었다. 김영삼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든 김영삼은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과 더불어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그의 삶과 정치를 돌아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김영삼의 삶과 정치
김영삼은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다음 정치에 입문했다. 1954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제14대까지 아홉 번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데모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사건을 통해서였다.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벌이다가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1970년 ‘40대 기수론’을 주창하고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출마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경쟁자 김대중에게 패배했지만 그는 광복 이후 제2세대 정치가들의 앞자리에 섰다. 1970년대 유신독재 아래서 신민당 총재를 맡았고, 1979년 뉴욕타임스 회견을 빌미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1980년대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가로 부상했다. 두 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고,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2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켜 공동의장을 맡았으며, 198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해 총선 돌풍을 이끌었다. 1987년에는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항쟁의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민주화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
민주화 시대 이후 김영삼의 삶과 정치는 드라마틱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노태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당시 김대중과의 후보단일화를 둘러싼 논란은 이후 민주화 세력의 분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승부사로서 김영삼이 자신의 존재감을 선명히 드러낸 것은 1990년 민정당·공화당과의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3당 합당을 통해서였다. 민주 개혁을 표방하던 민주당이 보수정당들과 통합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정치의 역동성과 민주당의 중도보수적 개혁성을 주목할 때 3당 합당은 실현 가능한 보수대연합이었지만, 동시에 민주화 운동에서의 그의 역할을 돌아볼 때 민주화 세력에겐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김영삼이 겨냥한 것은 국가권력 쟁취였다. 그는 1992년 민자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됐고,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과 정주영을 꺾고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군사정부와는 다른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정부는 이렇게 출범했다.
◇ 김영삼 시대의 명암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은 2001년 김영삼이 출간한 회고록이다. 두 권으로 이뤄진 이 책은 김영삼정부의 집권 기간인 1993년부터 1998년까지의 국정을 다룬다. 자신의 국정을 돌아보는 스스로 돌아본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기록이지만, 김영삼정부 5년의 진행 과정을 생생히 증거하는 저작이다.
김영삼정부의 역사적 위상은 세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노태우정부를 이은 민주화 시대의 두 번째 정부였고,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첫 번째 정부였으며, 그 빛과 그늘이 선명한 정부였다. 노태우정부에서 박근혜정부까지 민주화 시대에 집권한 정부들 가운데 김영삼정부는 집권 초반에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지는 크게 감소했고, 외환위기로 결국 쓸쓸하게 퇴장했다.김영삼정부의 주요 성취는 세 가지였다. 경제적 측면에선 금융실명제 실시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가입이 꼽혔고, 정치적 측면에선 군부의 권력 개입 차단과 정치관계법 실시가 주목됐다. 역사·사회적 측면에선 ‘역사 바로 세우기’가 국민적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금융실명거래의 정착 없이는 이 땅의 진정한 분배정의를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확립할 수가 없습니다. 금융실명제 없이는 건강한 민주주의도, 활력이 넘치는 자본주의도 꽃피울 수가 없습니다.”
1993년 8월 대통령 김영삼이 발표한 금융실명제 실시 특별담화문이다. 금융실명제는 김영삼정부 제1의 경제 업적이었다. 그 부작용이 없진 않았지만 투명한 시장경제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영삼정부는 금융실명제에 더해 부동산실명제를 실시했다.
김영삼정부의 주요 한계로는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외환위기가 그 하나였다면,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측근의 부정부패가 다른 하나였다.
1994년부터 김영삼정부는 시련에 직면했다.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건, 서해 페리호 침몰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등 대형 재난 사고들이 잇달아 발생함으로써 정부의 정당성은 서서히 약화됐다.
김영삼정부의 최대 시련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경제위기라는 외적 요인과 자본시장의 과도한 개방이라는 내적 요인이 중첩돼 발생했다. 무리한 자금 차입과 그에 따른 국제수지 불균형이 금융위기를 낳고, 여기에 유동성 부족이 결합돼 한국 경제가 부도사태를 맞이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커다란 위기에 빠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김영삼정부는 무능을 드러내 정당성을 크게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정치가 갖는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을 김영삼정부는 극적으로 보여줬다.
이 외환위기는 6월 항쟁 못지않게 이후 우리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터운 중산층이 감소하고 사회 양극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거시적으로 ‘발전국가’ 모델이 종언을 고하면서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진 ‘포스트 발전국가’ 모델로 나아갔다.
◇ 정치가의 미래
그의 삶 전체를 통틀어볼 때 김영삼은 우리 현대사에서 만나게 되는 대표적인 민주주의 정치가였다. 군부독재와 맞서 싸운 민주주의자 김영삼의 삶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했다. 하지만 그가 갖는 또 하나의 정체성이었던 정치가 김영삼의 삶은 그 마지막에서 아쉬웠고 비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 외환위기를 막지 못한 것은 그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26세에 국회의원이 된 이래 45년 동안,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서문과 마지막에서 그가 전한 말이다. 그는 모두가 개혁을 원했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고, 자신의 부족과 부덕에 대해 반추한다고 안타깝게 술회한다. 2015년 김영삼은 세상을 떠났다.
김영삼의 정치적 리더십을 이루는 세 요소는 자유주의, 민주주의, 계몽주의였다. 그는 자유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또 그는 국가와 시민사회 위에 존재하는 서구의 계몽군주와 유사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 계몽군주적 리더십은 귄위주의 경향을 갖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민주주의 리더십과 상충한다. 이런 유형의 리더십은 김영삼은 물론 김대중도 공유하던 것이었다. 김영삼 리더십의 한계는 그 자신의 한계였지만, 동시에 민주화 세력의 리더십의 한계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정치가의 리더십과 시민들의 팔로어십이 적절히 결합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올바로 운영되기 위해선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생산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치 리더십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항이다. 민주적·참여적·생산적 정치 리더십을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는 미래 100년의 우리 사회와 국가 발전에서 매우 중대한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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