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과 네덜란드ㆍ영국 연합군에 대항
1949년 처형돼 외국인 독립영웅 추서
8월 독립기념일 맞춰 대대적 재조명 행사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한국인 이름이 붙은 도로가 생긴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 연예인이 아니다. 대개 낯설거나, 누구에겐 애처로운, 아무에겐 껄끄러운 이름, ‘양칠성’이다. 그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했던 일본군 군속 출신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선 외국인 독립 영웅이다
3일 인도네시아역사연구협회(히스토리카)와 국립인도네시아대(UI) 등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서부자바 가루트(garut) 지역에 양칠성로(Jalan YANG CHIL-SUNG)가 조성된다. 압둘 바시드(44) 히스토리카 사무국장은 한국일보에 “네덜란드-영국연합군과 맞서 싸운 지역 주민들의 독립투쟁을 도운 영웅 양칠성을 기리기 위해 가루트시와 함께 추진하고 있다”라며 “정확한 도로 위치는 올해 안에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독립 투사들의 기록을 발굴해 알리고 그 후손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2014년 11월 설립된 히스토리카는 역사학자, 대학 교수, 언론인 등 회원 200여명을 거느리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람 이름을 딴 도로는 특별하다. 주요 도로 명칭은 수카르노(국부) 하타(초대 총리) 수디르만(초대 군 최고사령관) 다안모곳(소년장교) 등 주로 독립 영웅에게 허락된다. 외국인 중에선 파트리스 루뭄바(콩고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인도 초대 총리) 정도다. 그만큼 영예롭다. 에바 라티파(42) UI 인문대학 한국학과장은 “첫 한국인 도로인 양칠성로가 만들어지도록 학계와 시민단체가 2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고 설명했다.
양칠성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인정한 독립 영웅이다. 자카르타에서 동남쪽으로 170㎞ 남짓 떨어진 가루트는 1949년 양칠성이 네덜란드군에게 처형된 장소이자, 동료의 뒤늦은 증언에 힘입어 1975년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추서된 뒤 다시 묻힌 곳이다. 당시 비석엔 일본이름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가 새겨졌다. 창씨개명한 일제의 포로감시원으로 1942년 인도네시아에 건너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뛰어든 파란만장 삶 탓이다.
1995년이 되어서야 그는 국적과 한글이름을 되찾고, 묘비도 걸맞게 바꿨다. 일본인으로 묻힌 지 46년 만이다. 바로잡았지만 세월의 더께를 말끔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를 일본인으로 기억하는 인도네시아인이 많다. 이에 UI는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8월 17일) 즈음 양칠성을 소환한다. 에바 한국학과장은 “일본인으로 잘못 알려진 양칠성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연구를 통해 밝혀진 그의 활약상을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면 그가 ‘골수 친일’에다 마지막 순간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쳤다는 등 달갑지 않은, 외면하고픈 연구 결과들도 존재한다. 그래서인지 고려독립청년당 등 국외독립운동의 족적이 뚜렷한 인도네시아에서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행사가 최근 다채롭게 열리고 있지만, 양칠성의 자리는 없다.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그건 우리의 독립이 아니라는 단언이 암묵을 유도한다. 올해는 양칠성이 태어난 지 100년, 숨진 지 70년 되는 해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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