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중미 엘살바도르에 사는 후안 모랄레스 알바라도는 7세 아들을 등교시키던 중 갱단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8월에는 집 근처에서 건축 자재를 사던 마누엘 디아스가, 11월에는 가족과 휴가를 보내던 바레라 마옌이 각각 갱단에게 살해됐다. 이들은 모두 공권력의 한 축인 경찰이었고, 이들을 살해한 갱단은 악명 높은 ‘마라 살바트루차’(MS-13)였다.
엘살바도르는 ‘살인율 세계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만큼 심각한 치안 붕괴 상태에 놓여 있다. MS-13을 비롯해 전국에서 활개를 치는 갱단 규모가 6만여명으로 현지 경찰(2만3,000명)과 군대(2만명)를 합한 숫자보다 훨씬 많다. 인신매매와 마약 거래 등으로 자금을 불리고 조직원을 늘려온 이들 갱단은 시신 훼손 등 잔인함으로도 악명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M-13을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고 비난하며 카라반(중남미 이민자 행렬)의 유입을 막는 정책을 정당화했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엘살바도르는 치안을 책임져야 할 경찰들도 카라반 행렬에 가세하고 있다. 갱단을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 보복성 공격으로 목숨을 잃거나 일상적인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 1월 한달에만 경찰 9명이 살해됐다. 6일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현직 경찰 21명이 유엔과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망명을 신청해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모바일 메신저 왓츠앱에선 현지 경찰들로만 이뤄진 카라반까지 조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엘살바도르 경찰들은 무엇보다 경찰조직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작전 상황에선 얼굴 가리개를 착용하지만 법정에서 증언할 때는 반드시 얼굴을 공개하도록 돼 있어 일상적인 보복 위협을 피할 수가 없다. 현행법상 퇴근 후엔 무기 소지가 금지돼 있어 자체 호신도 사실상 어렵고, 월 40만원 수준의 박봉으로는 치안 안전지대에서 거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2017년에 경찰과 군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보호법안 제정이 추진되다 무산됐고, 이후 경찰 수뇌부가 내놓은 대책이라곤 고작 경찰들의 귀가를 일시 불허하는 정도였다. WP는 “많은 경찰들이 ‘경찰조직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국가를 떠나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1월 엘살바도르 법무부는 지난해 발생한 인구 10만명당 살인사건이 50.3건이었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수치만 놓고 보면 2015년의 103건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전체 발생건수 역시 전년 대비 15%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카라반 행렬이 갈수록 늘어나자 미국이 치안 불안이 심각한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3개 국가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결과였다. 미 회계감사원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2014~2017년 이들 3개국의 경찰력 강화를 위해 최소 4,800만달러(약 540억원)를 투자했고 연방수사국(FBI) 등의 치안당국자를 파견해 현지 경찰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미국 정부로부터 비밀자금을 지원받은 엘살바도르의 준군사 경찰조직이 갱단 조직원 43명을 불법적으로 살해했다는 유엔 보고서가 공개되고 이후 M-13이 대대적인 보복에 나서는 등 실제 치안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없는 상태다. 미국 망명을 신청한 한 경찰은 WP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경찰 1명이 갱단 100명을 상대해야 하는 곳에 들어가는 셈”이라며 “우리는 손쉬운 희생자”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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