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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양심과 이념, 어두운 시대의 후예들

입력
2019.03.08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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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생한 5ㆍ18민주화운동 모독 및 박근혜 대통령 탄핵 불인정 사건, 그리고 2014년 세월호 단식집회 옆에서 열린 폭식파티는 인간의 양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양심이 이념을 비판ㆍ견제할 수 있는 독자적인 능력을 상실해버리고 이념의 충실한 노예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이다.

양심은 보통 개인이 신봉하는 근본적인 도덕적 신념을 뜻하거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판단능력을 의미한다.(때로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처럼 과거의 잘못을 꾸짖는 내면의 목소리로, 드물게는 철학자 니체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나약함을 조장하는 악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조금 더 부연하면 자신이 신봉하는 도덕적ㆍ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려는 마음이나, 특수한 이념의 요구를 건전한 도덕적 상식에 비추어 비판ㆍ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양심의 이중적 의미는 공동생활에서 양심이 수행하는 복잡한 역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보통 특정한 이념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그 이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행동하는 양심’은 그런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양심은 이념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만은 않는다. 현실과 상식을 고려하여 이념 추구의 적절한 한계를 정하는 것도 양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정한 이념이나 신념에 대한 집착이 과도하여 양심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다. 전쟁이 남긴 심리적 상흔 때문이든 아니면 좋아하는 정치인을 군주처럼 떠받드는 봉건적인 의식 때문이든, 양심이 특정 이념에 사로잡혀 비판과 견제 기능을 상실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 때는 양심이 독자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해버리고 이념의 지시를 이행하는 전위부대로 전락하고 만다. 나치전체주의나 스탈린 체제처럼 어두웠던 시대는 이런 추세가 전 사회에 확산되면서 도래했다.

이념에 포획된 양심은 이념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이념적 허구를 사실과 진실로, 그리고 명백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허구로 전도시킨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에게는 경험적 현실과 상식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신봉하는 이념이 곧 사실이고 진실이기 때문에 이념과 충돌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짜고 허위로 간주된다. 이것은 양심이 이념에 의해 무뎌지거나 타락하면 얼마든지 반인간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지원하는 어둠의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conscience의 번역어인 양심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한자어 양심(良心)은 맹자의 성선설과 왕양명의 양지(良知)를 연상시켜 양심이 본래 선하고 깨끗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어둠은 양심과 이념의 긴장이 무너질 때 엄습한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이념을 일방적으로 강제하거나 구현하려 들 때, 혹은 막대한 권력 자원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양심을 세뇌시킬 때, 가공의 이념이 경험적 현실을 대체하는 ‘어두운 시대’가 도래한다. 한나 아렌트(H. Arendt)는 폭력적인 테러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대중들의 고독한 마음에 전체주의 이념이 파고듦으로써 어두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분석했다. 테러로 고립된 개인들이 더 이상 공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전체주의가 제공하는 ‘이념의 논리’(idea+logic)에 빠져들며 ‘큰 거짓의 세계’로 ‘자살적인 도피’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소통의 공간을 잃으면 인간은 건전한 도덕감각과 상식을 획득하기 어렵다. 민주적 소통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어야 옳고 그름에 대한 상식을 얻을 수 있고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기를 수 있다. 장기간 소통 공간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폐쇄적인 이념집단에 머물다보면 경험적 사실의 세계와 허구적인 거짓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상실하기 쉽다. 그럼에도 닫혀있는 어둠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보다 넓은 세계로 들어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던 어두운 세계가 더 익숙하고 편하며, 그곳에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밀폐된 세계에 적응된 이들에게는 바깥에 다른 세계와 행복이 있다는 외침이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어둠의 후예들을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전략은 정치사회적 분열을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그들의 신념과 가치는 그들이 살았고 경험했던 시대의 소산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즉각 버리라고 압박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삶의 궁극적 의미를 빼앗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최선의 대응책은 사회구성원들이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그들을 보다 넓은 소통의 공간으로 초대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만이 그들을 공동체의 소중한 일원으로 포용할 수 있는 동시에 어두운 시대의 재래를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찬란한 빛의 세계는 적이 경쟁자로, 그리고 경쟁자가 공존의 파트너로 변화되는 끊임없는 소통 과정을 통해서만 창출ㆍ유지되기 때문이다.

김비환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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