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정신질환 경험 470만명
차별ㆍ편견 등 사회적 불이익 탓
병원 찾는 사람 22% 그쳐 병 키워
“현명한 아내를 만나서 자식 셋을 낳았고 모두 명문대까지 보냈습니다. 제도사(製圖士ㆍ건축설계도면 전문가)로 일하면서 한때 돈도 많이 벌었어요. 서울랜드의 유명한 놀이시설도 제가 설계했죠. 이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20대 때부터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어디서도 얘기 안 합니다. 전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다가 우연히 투병 사실이 알려졌을 때 하마터면 직장까지 잃을 뻔했어요. 최근 다녔던 직장에선 동료들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약을 먹고 있습니다.” (대구의 K씨ㆍ56세)
한국사회에서 정신질환자는 농담거리 아니면 예비 범죄자로 취급 당하기 일쑤다. “정신병 걸렸냐”라는 비하가 우스갯소리로 쓰이는 사회다. 우울증 환자마저 마음 편히 치료받기가 어렵다.약을 타려고 휴가를 내는 사람도 있다. 병원에 다니는 사실이 들통나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두려운 탓이다. 한국인 4명 중 1명이 평생 한 번은 정신질환을 경험하지만 그 가운데 병원을 찾는 사람이 22%에 불과하다(2016년 보건복지부 실태조사).
◇”차별ㆍ편견 해소해야 모두가 행복”
정신질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초기치료를 주저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사회적 불이익이 큰 탓에 환자들이 병원을 늦게 찾고, 병을 키운다고 의료계는 입을 모은다. 지난해 연말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조울증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직후,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월 9일 국회에 출석해 “사회적 편견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충분히 검토하겠다”라고 밝히기는 했다. 그러나 박 장관의 발언은 구두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10일 복지부에 따르면 정신질환 인식개선사업 예산(홍보예산)은 2억원이다. 관련예산은 최근 10년 간 대체로 1억원대였다. 2017년 14억원으로 잠시 늘었지만 당시 정신질환자의 강제입원 규정을 까다롭게 한 정신건강복지법이 개정된 직후 ‘법 개정으로 응급입원이 불가능해졌다’는 루머를 차단하기 위해 금연예산에서 돈을 빌려왔던 예외적 사례다.
예산이 한정돼 있다 보니 사업 내용은 빈약하다. 지난해의 경우 토크콘서트, 온ㆍ오프라인 홍보물 유포 등 단발적이고 전파 범위가 좁은 사업들로 구성돼 있다. 대중매체 광고도 있지만 △교통방송 라디오(25회) △케이블 방송(이틀간 1개 채널)에 불과하다. 전국을 돌며 3번 차례 개최한 포럼의 참석자는 모두 1,004명밖에 안됐다. 금연광고의 ‘물량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해 금연광고는 지상파를 포함해 11개 TV채널에서 7개월간 방영됐다. 유명 작가와 협업한 포털 웹툰(2015년) 등 전달경로도 다양하다. 금연 홍보예산은 올해(241억원) 포함 최근 8년 연평균 176억원에 달한다.
◇ 건강증진기금 활용도 검토해야
복지부도 정신질환 홍보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나마 이 예산을 지키기도 벅차다는 입장이다. 재정당국이 정신질환 홍보예산은 가시적 성과물이 없는 예산으로 보고 최우선 ‘절감 예산’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홍정익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현재 정신질환 홍보예산으론 포스터 만들고 나면 온라인용 영상물 제작하기도 빠듯하다”면서 “지난해 케이블용 방송 광고도 캠페인성으로 송출료를 깎아줘서 가능했다”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2016년 한 해만 정신질환을 경험한 사람이 470만명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부 예산이 부족하다면 국민건강증진기금을 활용하는 대안도 있다. 지난해 기준 4조600억원에 달하는 이 기금은 그간 원격의료 연구개발 등 ‘건강증진’과 거리가 먼 사업에까지 쓰인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권오용 한국정신장애인연대 사무총장은 “영국 정부가 2013년 정신질환자 인식개선운동을 하는 민간단체 ‘마인드’의 캠페인 ‘타임 투 체인지’에 지원한 자금만 560억원 규모였다”면서 “복지부가 정신건강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국민건강증진기금 활용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라도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혁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심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발병했을 때 치료를 피한다는 연구들이 있다”면서 “해외처럼 정신질환을 겪은 연예인들이 캠페인에 나서는 식의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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