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00, 32400, 2132. 암호 같은 숫자가 적힌 사진들의 정체를 처음엔 알아차리기 어렵다. 눈에 드는 건 땅을 찍은 사진이라는 것 정도다. 사진 24장을 넘기고 나면 맞닥뜨리게 되는 한 문장. “이 사진들은 구제역과 조류독감 매몰지 3년 후를 촬영한 것이며, 제목으로 쓰인 숫자들은 그 땅에 묻힌 동물들의 수입니다.” 숫자 하나, 사진 한 장이 주는 송연함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사진과 글로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짚어 온 문선희 사진작가가 가축 매몰지를 2년 이상 추적한 기록이 책 ‘묻다’로 나왔다.
문 작가는 2014년 매몰지 100군데를 찾아 다녔다. 2010년 겨울 구제역과 조류독감으로 1,000만마리가 넘는 동물이 생매장된 4,799곳 중에 무작위로 골랐다. 가축전염예방법이 사체를 묻은 토지 사용을 제한하는 건 딱 3년. 그 이후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 작가는 의문을 품었다. ‘죽음을 품고 있는 땅이 과연 3년 만에 다시 온전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작가의 기록 여정이 시작됐다.
땅은,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어느 곳은 물컹물컹했고, 어느 곳엔 곰팡이가 피었다. 밭이 된 땅에 심은 콩과 옥수수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비닐 아래 가까스로 싹 틔운 풀은 이내 새까맣게 변해 죽고 말았다. ‘희망’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무참한 광경.
그럼에도 왜 우리는 매년 ‘살처분’을 목격해야 하는 걸까. 살아 있는 동물을 땅에 파묻는 행위는,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걸까. 문 작가에 따르면, 죽음으로써 전염병을 예방하는 ‘살처분’은 여러 예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수지타산에 예민한 인간은 육류 수출입에서 유리한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백신 예방접종 대신 살처분을 택한다. 법률은 ‘안락사 후 소각이나 매몰’을 권고하지만, 그마저도 지키지 않는다.
구제역 치사율은 다 자란 동물의 경우 5% 미만이다. 2주면 자연 치유가 가능하고 사람에게 전염되지도 않는다. 동물들의 병이 낫는 2주를 기다려 줄 여유가 농장주들에게 없다는 게 비극의 원천이다. 2010년 접수된 구제역 신고 153건에 의해 동물 347만9,962마리가 산 채로 땅에 묻혔다. 같은 해 조류독감으로 인해 살처분 된 가금류는 648만 마리다. 이중 실제로 조류독감에 걸린 건 단 91마리였다. 예방이라는 명목으로 동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생매장됐다.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인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진화한 것은 동물을 더 빨리, 더 많이 사육하기 위한 밀집 사육 시설 때문이었는데도. 잘못한 건 인간이었는데도.
묻다
문선희 지음ㆍ책공장더불어 발행
192쪽ㆍ1만3,000원
인간의 이기적 선택은 인간을 겨냥하는 화살로 돌아오기도 한다. 동물을 파묻어 본 사람은 그 충격에서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다. 동물들을 처참하게 묻는 행위를 가리키는 책 제목 ‘묻다’는, 살처분과 대량 사육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뜻하기도 한다. 책을 밀고 나가는 건 감정보단 숫자다. 그럼에도 “슬픔과 수치가 밀려들었다”는 작가의 심경이 읽는 내내 고스란히 전해진다. 책 정가의 6%는 예방적 살처분을 처음으로 거부한 동물복지 농장에 기부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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