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가 김호득ㆍ추상화가 마더웰
수묵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김호득(69), 추상주의로 미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로버트 마더웰(1915~1991). 35년의 나이 차, 서양과 동양이라는 먼 지점에 놓인 두 거장은 전혀 다른 작품 세계를 누빌 것만 같다. 공교롭게도 서울 삼청동에서 같은 시기 열리고 있는 둘의 개인전은 오랫동안 각자였던 두 거장을 하나로 이어 준다. 여러 면에서 마더웰은 김호득을, 김호득은 마더웰을 닮아있다.
우선 흑과 백, 선과 점, 여백과 채움을 중심으로 한 표현 기법이 맞닿은 지점이다. 삼청동 바라캇 컨템포러리의 마더웰 개인전 핵심 작품은 ‘스페인 공화국에서의 비가(悲歌)’다. 1948년쯤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그가 삶과 죽음을 철학적으로 표현하며 시작된 연작이다. 세로로 긴 사각형과 타원형이 주요 모티프다. 캔버스 위에 쓰인 색이라곤 흑색, 백색, 회색 정도다. 선의 휘어진 정도나 거친 붓의 질감만으로 생동감을 표현한다. 지극히 동양적 유화다.
삼청동 학고재 김호득 개인전에 나온 ‘폭포 연작’도 마찬가지다. 캔버스 삼은 베이지색 광목천을 채운 건 서너개의 긴 선과 원뿐이다. 작가의 몸과 대형 붓을 함께 움직여 즉흥적으로 그은 붓 자국만으로 자연과 생명력을 표현한다. 김호득 역시 커다란 여백을 남겼다.
두 작가는 동양과 서양의 문법을 접합하고 변용했다. 마더웰은 일본의 선불교와 서예에 관심이 깊었고 일본 아트그룹인 구타이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아시아적 영감이 추상적 서예화를 닮은 작품으로 이어졌다. 김호득은 스스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요소를 두루 소화한다”고 강조할 정도로 동양과 서양의 융합에 공을 들인다. 그의 수묵은 한국적 수묵이 아니다.
미술계의 문법을 깬 실험 정신도 두 작가가 공유하고 있다. 마더웰은 20세기 미국 현대미술의 가장 혁명적인 운동으로 꼽히는 ‘추상표현주의’를 주도했다. 당시 서양 미술은 화면을 물감으로 꽉 채우는 것이 주류였는데, 마더웰은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과 함께 활동하며 그 틀을 바꾸었다. 김호득 역시 ‘수묵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묵의 농담 차이, 세밀한 표현 같은 전통적 요소를 과감히 뒤로 하고 대담한 붓 표현과 여백 등 현대적 표현 기법에 천착했다. 김 화백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무엇을 작품 대상으로 삼느냐’는 질문에 “특정 사물이나 풍경을 보지 않고 오직 머리 속으로만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현실 세계의 것은 아무도 없고 온전히 정신상태를 그린 작품이다.” 생전의 마더웰이 초기작 ‘스페인 감옥’ 연작에 대해 내놓은 설명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두 작가의 삶의 궤적은 겹쳐지지 않는다. 마더웰은 20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붓을 들었다. 미국 웰스 파고 은행장, 유니언 트러스트 컴퍼니 사장을 역임한 아버지 덕에 ‘금수저’로 자랐지만, 부모가 화가로 사는 삶을 반대한 탓이다. 1932년 미국 스탠포드대학에 진학해 철학을 전공할 수밖에 없었고,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하면 미술 전공을 허락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하버드대에서 철학 박사 과정까지 밟았다. 그래서 24세 때인 1939년 회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폭발적 작업을 한 끝에 같은 해 6월 개인전을 열었다. 미국 블랙마운틴컬리지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로버트 라우센버그, 사이 톰블리 등이 그의 제자다.
작가로서 김호득의 길은 보다 순탄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때 상경해 서울예고에서 서양화, 동양화를 고루 익혔다. 서울대 미대에 진학한 뒤 당시 화단 주류였던 단색 위주의 서양화 화풍에 회의를 느끼고 동양화에 집중했다. 서울대학원 동양학과를 졸업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 단체전 등에 초대를 받긴 했지만, 첫 개인전은 36세 된 해에 열었다. 영남대에서 동양화를 가르치다 최근 퇴직해 경기 여주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의 마더웰 개인전은 비가 연작 등 페인팅과 습작, 판화 등 23점으로 구성된다. 학고재에서 열리는 김호득의 개인전엔 페인팅과 물, 한지 등을 활용한 설치작 등 37점이 나왔다. 마더웰 개인전은 5월12일까지, 김호득 개인전은 4월7일까지 열린다. 바라캇 컨템포러리와 학고재는 약 500m 거리. 두 전시를 함께 보는 걸 권한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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