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정전(停電) 사태뿐 아니라 그에 따른 인명손실이 발생하면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 퇴진 압박이 정점을 향하고 있다. 그간 베네수엘라 문제는 ‘한 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정치적 위기’로 규정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정전 사태로 베네수엘라의 ‘인도주의적 위기감’이 증폭되며 개입 명분을 확보한 미국이 거세게 마두로 정권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두로 정권의 돈줄로 지목된 러시아 은행에 제재를 가하고, 인도에 베네수엘라 원유 금지 요청을 하는 등 전방위 대응에 나섰다.
11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의회는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후안 과이도 의장이 제안한 국가비상사태 선언을 받아들였다. 과이도 의장은 “베네수엘라에는 (현재)정상적인 것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이 국가비상사태 결정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베네수엘라에서는 지난 7일 이후 국가 대부분이 암흑에 갇히는 대규모 정전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일부 복구된 곳도 있으나, 정전 발생 닷새째인 이날까지도 수도 카라카스를 비롯한 전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정전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의 식량ㆍ식수난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암흑을 틈타 각종 약탈 범죄가 빈발하고 있으며 지하철 등 기본적인 교통 인프라도 마비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뉴욕타임스(NYT)는 “병원 곳곳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이 의사들에게 ‘살려 달라’고 외치는 절망적 상황”이라고 전했다. 베네수엘라 의사들이 결성한 비정부기구(NGO) ‘건강을 위한 의사들’은 10일 기준으로 “베네수엘라 전국 40개 주요 병원에서 정전으로 사망한 입원 환자가 21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인도주의적 위기감 증폭 분위기를 타고 마두로 대통령을 끌어내기 위한 미국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미 재무부는 이날 러시아의 에브로파이낸스 모스나르 은행에 제재를 가했다고 발표했다. 마두로 정권의 자금 줄인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PDVSA)와 석유 및 인프라 공동개발 사업을 두고 거래를 해온 혐의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부 장관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겪는 경제 파탄과 인도주의적 위기에 원인을 제공한 외국 금융기관에 대한 조치”라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은 작심한 듯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베네수엘라의 인도적 위기를 지적하며 “베네수엘라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꿈과 풍족한 삶이 갉아 먹히고 있는 곳에 러시아와 쿠바가 있다”고 비난했다. 석유 거래로 얽혀 있는 베네수엘라의 우방국들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폼페이오 장관은 또 “베네수엘라에서 원유를 수입하고 있는 인도에도 미국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사실상의 단교조치도 취했다. 베네수엘라에 남아 있는 공관 인력 모두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현지 상황이 악화됐을 뿐 아니라 공관 인력 잔류가 미국의 정책에 제약을 주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군사 개입 등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대비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마두로 대통령의 망명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베팅사이트 프레딕트잇에 따르면 지난달 22일까지만 해도 20%대 후반이던 마두로 대통령의 연내 실각 가능성이 최근 50%대까지 높아졌다. 한국국방외교협회도 이날 내놓은 ‘베네수엘라 사태 전망’ 자료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서방의 퇴진 압박 및 제재 강화로 향후 정권 유지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망명을 준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지난 10일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베네수엘라에서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 살기를 기대한다”며 우회적으로 망명을 촉구했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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