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화 기술의 혁신가 이필우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미국 영화 ‘재즈 싱어’는 일대 혁신이었다. 1927년 10월 6일 공개된 이 최초의 유성 영화는 음악만 부분적으로 녹음되었을 뿐, 대사는 여전히 자막으로 전달되는 불완전한 형태였지만, 전 세계 영화계를 뒤흔드는 지각변동의 서막이었다. ‘뉴욕의 불빛’(1928)과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1928)가 대사까지 완벽하게 녹음하게 되면서 유성영화는 시대의 대세로 자리 잡는다. 순식간에 75%의 영화가 유성영화로 제작될 정도가 되었고, 극장들은 서둘러 유성영화를 상영할 음향 설비를 갖추었으며, 몸짓으로만 연기하던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 상당수가 시류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안길로 밀려났다.
◇일본 발성영화 개발에 앞장 서다
머잖아 유성영화의 시대가 될 것임을 감지한 사람 중에는 최초의 조선인 촬영감독 이필우(1899~1978)도 있었다. 18세에 혈혈단신 오사카에 건너가 고사카(小阪) 촬영소에서 촬영과 편집을 배워온 그는 쇼치쿠, 닛카츠 영화사의 촬영기사로 일하며 실전 경험을 쌓은 인재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귀국하자마자 ‘장화홍련전’(1924ㆍ순수 조선 스태프로 찍은 첫 영화)의 촬영에 투입된 그는 이구영과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세워 ‘쌍옥루’(1925)의 카메라를 잡고, 반도키네마를 설립해 ‘멍텅구리’(1926)를 연출하는 한 편으로는 상하이와 일본을 오가며 영화에 관련한 신기술과 장비들을 습득해 돌아오곤 했다. 이필우는 단순한 촬영감독을 넘어선 테크니션이자, 조선영화계의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노력한 개척자였던 것이다.
나운규가 ‘아리랑 후편’(1930)을 준비할 무렵, 필름과 레코드를 동시에 돌려 상영하는 초기 디스크 방식의 유성영화를 접한 이필우는 ‘아리랑 후편’을 유성영화로 만들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다. 미나토키 회사와 접촉해 레코드를 구입하려던 계획은 약속한 예산을 받지 못해 무산되었지만,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의 사장을 통해 기술자 쓰지하시(土橋)와 나카가와(中川)와 일하게 된 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조선보다 영화가 발전해있던 일본에서조차 당시엔 유성영화의 기술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이 두 사람이 토키(발성영화)를 연구하는 첫 걸음을 내딛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필우가 레코더를, 쓰지하시와 나카가와가 앰프를 담당해 토키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는 식으로 작업은 진행되었다.
이필우의 활약은 답보 상태에 있던 일본식 토키 시스템의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하이 체류 시절, 20세기 폭스사의 뉴스팀이 상하이에 머물러있다는 걸 떠올린 그는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뉴스팀과 접촉한다. 토키의 실물을 보여 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했지만, 중국인 스태프의 환심을 산 이필우는 몰래 들어가 “암푸(앰프)에 깜빡깜빡 하는 것을 필름에 갖다가 반사만 시키면 되는” 사운드필름 방식의 원리를 파악한다. “일본에 있는 것은 너희 둘의 권리가 분명하되, 한국에 나가서 내가 무슨 일이 있든 와서 봐주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쓴 이필우는 쓰지하시와 나카가와가 만든 장비에 자신이 관찰한 바를 더해 토키를 완성한다. ‘쓰지하시 시스템’이라 명명된 이 기기를 사용한 고쇼 헤이노스케의 ‘마담과 아내’(1931)는 일본 최초의 유성영화로 역사에 기록된다.
쓰지하시 시스템은 큰 호응을 얻으며 초기 일본 유성영화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마사오카 겐조의 ‘힘과 여자의 세상’(1932), ‘복수하는 까마귀’(1933), ‘갱과 무희’(1933)가 쓰지하시 시스템을 도입했고, 무성영화를 고집하던 오즈 야스지로도 ‘외아들’(1936)을 유성영화로 작업할 정도였다. 귀국한 이필우는 단성사의 투자를 얻어 밑바닥에서부터 조선식 유성영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일본에 편지를 써서 프리츠 랑의 ‘M’(1931)의 필름을 받았지만, 정작 조선 천지에 어느 곳을 가도 유성영화를 틀 설비가 없었던 것이다. 훗날의 인터뷰에서 “영사기계가 있어야 영사를 하지. 울화통이 치밀어서 아예 보통영사기를 하나 뜯어서 만들었다”라 할 정도로 기술적으론 낙후했던 것이 식민지 영화계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간이 녹음실에서 만들어낸 첫 유성영화
이필우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옛 동료 쓰지하시와 나카가와는 쓰지하시 시스템의 광범위한 성공으로 제법 큰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교토의 녹음기사연구회에서 옛 동료와 재회한 이필우는 지원을 약속받고 3년을 일본에서 카메라 개발로 보내다 돌아와 경성촬영소의 기술책임자로 일한다. 원산만 프로덕션의 물주였던 흥행사 와케지마 슈지로의 명의로 땅을 매입해 세운 경성촬영소는 비록 “조선극장 옆 동에, 겉은 송판때기고 내부는 방음장치 역할을 한다 해서 신문사에서 지형 뜨는 종이를 발라놓고 시작”한 초라한 꼴이었지만 라이트 파르보, 아이모 카메라 같은 현대적 촬영기기를 구비한 조선 최초의 촬영소였다. 필름을 구입할 돈조차 부족해 이스트먼 필름 대신 일본 후지사의 시험용 공짜필름을 얻어 작업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전과자’(1934)와 ‘홍길동’(1934)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경성촬영소는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이필우의 생각은 온통 유성영화로 가득 차 있었다. ‘M’을 상영했을 때 관객이 별로 들지 않았던 걸 잊지 않았던 그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를 트느니 조선말이 들리는 조선의 유성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한다. 1,200원을 투자해 필요한 설비를 구입하고 감독은 동생인 이명우, 각본은 이기세, 촬영은 이필우 본인이 맡았다. 처음 시도하는 유성영화인 만큼 제작진의 고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촬영장의 방음이 잘 되지 않아 1,600매의 멍석을 사다가 물에 적신 뒤 두 겹으로 막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행상이 떠드는 소리, 자동차 소음, 닭이나 개가 짖는 소리 탓에 재촬영이 빈번했고, 민요 ‘농부가’를 삽입하려 했던 아이디어는 비용 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홍난파가 작곡한 주제가는 빅터 레코드에 의해 김복희의 노래로 취입할 수 있었다. 갖은 고생을 거친 이필우의 집념은 마침내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 ‘춘향전’(1935)으로 결실을 맺는다.
문예봉을 춘향, 한일송을 이도령, 김연실을 월매, 노재신(배우 엄앵란의 어머니. ‘오발탄’(1961)의 철호 어머니 역)을 향단으로 캐스팅한 ‘춘향전’은 1935년 10월 3일 단성사에서 공개되어 13일까지 극장을 지켰다. 무성영화 제작비의 두 배가 들어간 만큼 보통 30~40전을 받던 입장료를 곱절 넘는 1원으로 올려 받았지만, 상영 첫 날부터 전석 매진되어 “단성사 문간에 사람들이 동대문쪽으로도 일렬로 서고, 창덕궁쪽으로도 일렬로 서고 대성황이었다”고 한다. 연기와 각색의 미흡함을 지적하는 평론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우리 기술진이 만든 첫 유성영화라는 사실에 대견스러워 했다. ‘춘향전’의 성공은 뜻하지 않은 별명을 이필우에게 안겨주었다. 이필우, 이명우 형제와 주연배우 문예봉이 코가 큰 편이었기에 “대비생(大鼻生: 코 큰 사람) 셋이 토키 ‘춘향전‘을 완성시켰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고, 이후 이필우의 별명은 대비선생(大鼻先生)이 되었다고 한다.
◇동시녹음 도입, 로케이션 녹음… 잇단 기술 혁신
‘춘향전’의 성공은 조선영화계에 유성영화의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듬해인 1936년 제작된 9편의 조선영화 중 다섯 편이 유성영화일 정도였다(이 중 ‘미몽’(1936)은 ‘청춘의 십자로’(1934)가 발굴되기 이전, 필름이 남아있는 한국영화 중 가장 오래된 영화였다.) 이필우는 ‘장화홍련전’(1936)에서 동시녹음을 도입하고 ‘홍길동전 후편’(1936)에서 로케이션 녹음을 시도하는 등 조선영화계의 기술혁신을 주도하는 독보적인 존재로 우뚝 선다.
만주로 건너갔다가 해방을 맞이한 이필우는 해방 정국에선 외화를 배급하면서 미 공보원의 뉴스릴 필름을 제작했고, 휴전 이후에는 안양촬영소의 건립을 감독했다. 한국영화의 물적 기반을 개선하고자 한 평생의 노력은 생애 늘그막까지 손을 떠나지 않아, 만년에는 부산에 종합촬영소의 건립을 추진하다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78년 10월 20일 눈을 감았다. 한국 영화 산업이라는 거대한 산은 이필우라는 거인(巨人)이 다져 쌓은 토대 위에 세워졌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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