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현남면 ‘매호재’
※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집 공간 사람’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결혼할 때 아내(51)는 남편(59)에게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정원일의 즐거움’을 선물했다. ‘정원이 있는 집에서 한평생 즐겁게 살자’란 의미였다. 그게 현실이 되기까지 꼬박 18년이 걸렸다. 그간 부부는 일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도심 아파트의 편리한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은퇴를 앞두고서야 용기를 냈다. 3년 전 강원 양양군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 매화가 핀 호숫가와 수수밭, 솔숲이 어우러진 풍경에 이끌려 연고도 없는 양양에 땅을 사고 매호재(梅胡齋)를 지었다.
◇50대 부부의 예술 놀이터
매호는 양양군 현남면의, 물길이 바다로 이어지는 석호 이름이다. 연면적 238㎡ 크기의 매호재는 매호의 가장자리에 야트막한 솔숲을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집은 50대 맞벌이 부부의 ‘세컨드 하우스’다. 세컨드 하우스는 주말 전원 생활용으로 마련한 주말 주택이다.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별장이나 귀농한 이들의 전원 주택과는 성격이 다르다. 최근 소득 수준이 올라가고 주 5일제 정착으로 여가 시간이 늘어나면서 세컨드 하우스가 보편화하고 있다. 매호재에서 만난 건축주 부부는 “주중에는 서울에서 미세먼지에 시달리고 일에 치이지만, 주말이면 여기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며 “매호재는 은퇴 이후 본격적인 놀이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교수인 남편은 5년 후 퇴직한다. 부부는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매호재가 도시의 지친 삶을 달래 주는 피난처이기만 한 건 아니다. 목공과 무인항공기(드론) 조종이 취미인 남편과 그림과 공예에 조예가 깊은 아내는 매호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아내는 “50대가 되면서 아이들 교육 문제에서 벗어나고 은퇴를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여가에 관심이 쏠렸다”며 “취미를 중심으로 모임도 생기고, 새롭게 친분이 생긴 이들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어 부부는 “주위에 문화적 재능과 지식을 가진 이들이 많은데 아마추어들이다 보니 이런 재능을 보여 주고 교류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며 “대단하진 않아도,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과 소소하게 문화적인 것들을 나눌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 2시간 남짓 거리인 양양에 부부가 그런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소식에 지인들도 기뻐했다고 한다.
◇’전시와 거주를 동시에’, 건축가의 해법은
건축가에게는 복합문화공간과 생활공간의 기능을 함께 갖춘 한 집을 지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떨어졌다. 부부는 “여러 사람을 초청해서 문화활동을 할 수 있으면서 숙식도 할 수 있는 집이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설계를 맡은 H2L건축사무소 현창용 소장은 “그림 등 전시 작품이 돋보이게 하려면 공간 디자인은 최대한 밋밋하고 튀지 않게 하는 게 기본”이라며 “그런 공간에 주방, 화장실, 침실 등 생활 공간까지 확보해야 하는 건 난제였다”고 했다. 매호재는 작품 수장고와 목공 작업실, 주차 공간이 있는 지하 1층과 전시장에 게스트룸 2개가 딸린 1층으로 구성돼 있다. 내부는 모두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해 회색의 거친 공간으로 완성됐다. 현 소장은 “예쁘고 따뜻한 집보다는 담백하고 중성적인 집을 지어 달라는 건축주의 요구도 있었지만, 전시 작품이 돋보이려면 색채 없는 공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무채색의 공간이지만, 집 앞뒤로 뚫린 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호두나무 합판으로 제작한 주방 가구, 수납장이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전시 공간 중간에 섬처럼 놓인 주방엔 미닫이 문을 달았다. 문을 닫으면 잡다한 살림살이가 감춰진다. 주방 뒤로는 세면대가 부착된 수납장이 주방과 직각을 이루며 놓여 있다. 현 소장은 “가정집처럼 주방이나 수납장을 벽에 붙이면 동선이 끊어져 그림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주방과 수납장도 전시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지도록 동선을 순환하는 모양으로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디귿(ㄷ)’ 모양의 건물 안쪽 벽을 따라 관람객들은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고, 동시에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현 소장은 “작은 공간일수록 순환하는 동선을 만들면 경험하는 공간이 더 커지고 복합적으로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세면대를 화장실과 분리한 것은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한 배려다.
건물 양옆에 날개처럼 달린 공간은 부속 전시 공간이면서 동시에 생활 공간이기도 하다. 다만 방문이 없다. 현 소장은 “방문으로 용도를 제한하기보다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문을 달지 않았다”며 “다만 전시장에서는 방이 전혀 보이지 않아 프라이버시가 충분히 보호된다”고 말했다.
◇건물 앞은 감상용, 뒤는 노동용
주택의 가장 큰 매력은 마당이다. 대부분의 주택은 마당을 집 앞에 두고 있는 구조다. 한정된 택지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도심 속 주택 단지가 특히 그렇다. 마당을 테두리로 구획해 테두리를 만들어 집에서 내다보이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풍경’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넓게 펼쳐진 수수밭, 산 등선을 따라 이어지는 솔숲의 넉넉한 풍경에 둘러싸인 매호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당을 굳이 내지 않아도 자연을 감상하는 데 지장이 없다. 부부는 그래서 ‘ㄷ’자 건물의 열린 부분이 뒷산을 향하게 했다. ‘ㄷ’자 중앙에는 한옥의 중정 같은 공간을 마련했다. 이 공간에 잔디를 깔고 소형 풀장과 텃밭을 만들었다. 부부는 “매호재 앞 수수밭은 감상용이고, 뒷산을 마주한 뒤편 마당은 노동용”이라며 “풀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마당 텃밭에서 채소를 가꿔 먹을 생각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18년 전 ‘정원이 있는 집’을 꿈꿨던 부부는 지금은 ‘문화가 있는 집’을 꿈꾼다. 부부는 다음달부터 가구 디자이너 김영근의 전시를 시작으로 다양한 아마추어 작가들을 초청할 계획이다. 예술가와 관객이 매호재에서 함께 먹고 자면서 얘기하는 ‘1박 2일,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열 생각이다. 물론 입장료는 무료다.
“나이 들어서 편하게 누워 있는다고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으면 더없이 행복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조용하고 여유롭게 정원을 가꾸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다일 것 같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흥미로운 문화를 공유하고 배워 가는 재미도 크더라고요. 매호재가 ‘살기’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놀기’에는 충분합니다.”
양양=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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