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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한일관계] 외교ㆍ경제ㆍ문화까지... 한일 ‘파경’ 도미노

입력
2019.03.26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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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반일-혐한’ 악순환 고리

 대법 강제징용 판결로 갈등 증폭… 日재계 ‘정경분리’ 기조 변화 

 ‘대북제재 완화’ EU 설득 훼방까지… 일본인들 한국 관광 꺼려 

 

최근 수년간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든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식당 입구에 25일 '이럇샤이마세(어서 오십시요)'라는 일본어가 적혀 있다. 홍인기 기자
최근 수년간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든 서울 중구 명동의 한 식당 입구에 25일 '이럇샤이마세(어서 오십시요)'라는 일본어가 적혀 있다. 홍인기 기자

24일 오후 한류(韓流) 중심지인 도쿄(東京) 신주쿠(新宿)구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 악화한 양국 관계에 아랑곳없이 초입부터 꽉 메운 10대 여학생들 때문에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방탄소년단(BTS) 지민의 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고생은 “한일관계가 안 좋다지만 케이팝(K-POP)을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2012년 혐한(嫌韓) 분위기를 겪어봤기 때문이다. 오영석 신주쿠 한인상인연합회 회장은 “아직 불매운동은 없지만 갈등이 장기화할 경우 위기가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걱정했다.

실제 일본에서는 혐한 정서가 다시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최근 김포공항에서 만취 상태로 공항 직원을 폭행한 뒤 “한국인은 싫다”며 노골적인 반한 감정을 드러낸 일본 후생노동성 간부 같은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달 초 일본 다카마쓰(高松)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한 항공기에서는 새치기 문제로 시비가 붙은 일본인이 “당신 같은 민족이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며 한국 승객에게 막말을 하기도 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최근 잇달아 불거진 한일관계 악재들_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최근 잇달아 불거진 한일관계 악재들_김경진기자

묵은 갈등이 재점화한 건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이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후속 판결도 잇따르고 있다. 25일에 대전지법이 미쓰비시(三菱)중공업의 재산 압류 결정을 내렸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매우 심각”하다며 적절히 대응해 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문제는 외교에서 난 불이 비즈니스와 민간 교류, 국제 외교 무대에까지 옮겨 붙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과거사 앙금에서 비롯된 반일 기류가 부메랑처럼 실질적 불이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그래픽=김경진 기자

 ◇한일 비즈니스 경고음에 재계 안절부절 

가장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건 재계다. 일단 경제 단절은 양국 모두에게 피해라는 게 양국의 공통 인식이다. 일본에겐 미국ㆍ홍콩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무역흑자(2018년 241억 달러)를 내는 한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힐 수밖에 없고,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부품이나 각종 기계를 들여오는 통로가 차단돼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의 제조장치는 전체 수입량의 32%(2018년 62억 달러)가 일본산이다.

하지만 일본 경제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가 무기한 연기된 데 이어 5월 열릴 예정이던 ‘한일 경제인 회의’ 역시 9월 이후로 돌연 연기됐다.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라는 과거 기조가 바뀌는 기류다. 일본에서 큰 규모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 10대 그룹 관계자는 “과거 한일관계가 악화됐을 때도 일본기업들은 외교와 비즈니스는 별개 문제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최근에는 일본 정부의 강경한 방침 때문에 기업들 내부에서조차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 주재 일본 기업에 근무하는 한 인사는 “지난달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 사죄 요구 발언 이후 일본인, 일본업계의 한국에 대한 감정이 더 나빠졌다”며 “일본인들은 역사상 처음 생존해 양위하는 아키히토 왕에 대해 애틋한 정서가 있는데 그걸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일본인은 한국행 머뭇,한국인은 일본 러시/ 강준구 기자/2019-03-25(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일본인은 한국행 머뭇,한국인은 일본 러시/ 강준구 기자/2019-03-25(한국일보)

 ◇EU 설득 실패ㆍ북미 악화… 뒤에는 일본 

대일 관계 악화로 받는 타격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작지 않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유럽연합(EU) 주요 국가 순방 당시 상황이 대표적이다. 문 대통령은 프랑스ㆍ영국 정상과의 회담에서 조기 비핵화 유인책으로 대북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설파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설득에는 실패했다. 본래 인권 문제를 중시하는 유럽 국가들이 북한에 강경하기는 하지만 당시 일본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훼방도 한몫 했을 가능성이 크다.

산케이(産經)신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아셈(ASEMㆍ아시아유럽정상회의) 전체 정상회의에 앞서 모두 연설을 하기로 돼 있던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개별 회담 자리에서 “북한 비핵화를 위해서는 제재를 완전히 이행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산케이는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보다 먼저 마크롱 대통령과 만나 제재 완화 협조를 요청하는 등 한일 간에 이견이 드러났지만 결과적으로 아베 총리가 독일ㆍ프랑스와 함께 논의를 이끄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한미 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공조에도 일본은 걸림돌이다. 일본의 워싱턴 동북아 정책 주류와의 인맥이 워낙 탄탄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재팬 커넥션’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북한 정권의 비핵화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만큼 강한 압박을 지속해야 한다’는 논리를 워싱턴 엘리트 집단에 공급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양국 갈등에 한국行 주저하는 일본인들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753만8,997명이다. 2015년(400만2,095명)에 비해 2배 가까이 급증했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가시 돋친 말을 주고 받고 인기 관광지인 교토에서 혐한 시위까지 벌어지는 등 관광 환경이 예전만 못해도 한국인의 일본 관광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이달 초 일본 오키나와에 다녀온 의사 정문용(43)씨는 “미국과 관계가 안 좋으면 미국 제품 안 쓸 거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한국을 찾는 일본 관광객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는 300만명을 밑돈다. 한국 방문 일본인 관광객은 양국 간 현안이 불거질 때마다 큰 폭으로 감소하거나 정체를 보였다. 증가 추세에 있던 방한 일본인 관광객 수는 2012년 8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이후 급감했다.

환율 안정세를 발판으로 올 1~2월 방한 일본인 관광객은 지난해보다 25.2%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 아소 부총리가 비자 발급 정지를 보복 조치로 거론하자 우려가 커졌다. 한국관광공사의 한 관계자는 “단체장이 책임을 져야 하는 수학여행과 기업 인센티브 등 단체여행 수요가 줄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밝혔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일단 대응ㆍ맞대응 게임이 시작되면 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 게 양국 관계 구도”라며 “최선이 아니더라도 결국 우리가 적극적으로 경색된 관계를 풀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남상욱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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