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신뢰회복이 우선이다
갈등 단초된 청구권협정ㆍ위안부합의는 양국 정부가 나서기 힘들어
전문가 “정상과 닿는 실력자에 위임해 넓은 선택지 갖고 담판을” 지적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한일 갈등의 근원적 해법은 전문가들도 선뜻 내놓기 힘든 지난한 숙제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이 배상해야 한다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이 재점화하기는 했지만 애초 양국관계의 기저에는 과거 악연으로 티격태격하며 쌓인 불신과 반감이 깔려 있었다.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이 그것이다. 하지만 상황 악화를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국 정상이나 정부가 공식 개입하기 부담스럽다면 늦지 않게 물밑 채널이라도 가동해 외교 마찰이 경제, 문화 등 사회 다방면으로 번지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조언이다.
무엇보다 징용 배상 판결 후속 조치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조언이 적지 않다. 판결 후속 조치로 강제집행 절차가 본격화할 경우 일본의 경제적 대응 조치가 불가피해지고 그러면 양국관계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26일 “결론적으로 정부가 직접 풀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면서도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강(强) 대 강(强)’ 국면으로 진행돼 끌려가듯 정부 간 논의가 시작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주도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방안을 모색하는 쪽은 한국이어야 한다는 게 양국 전문가들 제언이다.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징용 배상 문제를 두고 근근이 버티는(muddle through) 전략을 택하면 사실상 악화의 길로 걷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며 “우리가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 탈출구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쿠조노 히데키(奥薗秀樹) 시즈오카(静岡) 현립대 교수도 “일본 입장에선 대법원 판결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문제인데도 한국 정부는 6개월가량 ‘검토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으로 양국관계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난국 타개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현재로선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東京)대 교수는 “현재로선 가장 소통이 되지 않는 레벨이 지도자들로 지금까지 통역만 대동한 채 단둘이 만나 대화해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기미야 교수는 “(두 정상이) 선입견을 갖고 서로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 자주 얘기를 나누면서 '상대의 진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대일 특사 파견도 방법이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문 대통령이 3ㆍ1절 기념사에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언급한 뒤 후속조치가 필요하다”며 “관계가 더 악화되기 전 관리하는 차원에서라도 서로의 메시지 교환을 위해 상반기 중 특사 파견이나 교환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주무 부처인 외교부가 크게 힘을 못쓰는 상황에서 대외관계를 사실상 지휘한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출신으로 최근 주일대사로 낙점된 남관표 전 차장의 역할론도 부상하고 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정부가 대일 문제를 풀어가는 방향이나 의지를 보여주거나 아직 국내적으로 논의가 필요하니 좀 더 기다려달라며 달래는 역할을 남 전 차장이 맡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국 정부가 직접 나서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다. 특히 강제징용 판결의 경우 일본 기업과 한국 피해자들 간 민사소송에 관한 것이어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설 수 없다면, ‘물밑 접촉’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사소한 문제가 심각하게 비화한 ‘초계기 레이더 조사(照射) 및 저공위협 비행 갈등’도 양해를 구하고 조율하는 채널만 있었다면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남기정 교수는 “한일관계처럼 어려운 문제는 맥락을 아는 전문가들이 물밑에서 논의해야 하는데, 현 정부 들어 이런 기조가 없어졌다”며 “공식 비공식을 불문하고 정상과 닿는 실력자가 위임을 받아 넓은 선택지를 갖고 담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일 공공외교를 강화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정부 간 소통이 힘든 상황인 만큼 일본 국민을 상대로 직접 한반도 평화 구상을 알리고,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히면 일본에도 새 시장 형성이나 안보 비용 절감 같은 효과가 있다고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일관계를 각자의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양국의 분위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건 전문가들의 이구동성이다. 김기정 교수는 “민족주의는 자가증폭력이 있어 장기적으로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며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 전 대사 역시 “일본 내부에서 정치권 인사들이 반한 감정을 조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관제 민족주의로 반일 감정을 키우는 건 우리가 더 심하다”며 “국내 정치에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한일관계가 자꾸만 악화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양국 언론이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오쿠조노 교수는 “한일관계는 대단히 중층적인데 언론에서 정치ㆍ외교만 강조해 보도하고 대립을 부추기기 일쑤”라며 “한일 정치ㆍ외교가 꼬인 상황에서 언론이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실제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내 케이팝(K-POP) 인기가 식지 않고 있으며 5,000만 한국 인구 중 760만명이 일본을 찾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한일 양국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오쿠조노 교수는 “한일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화했지만 일본은 대등한 한국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해 보이고, 한국은 자신감 과잉의 상태로 보인다”며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질서 변화를 인식하고 상대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도쿄=김회경 특파원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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