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한일청구권협정ㆍ‘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일등공신
김종필은 “제2 이완용 되어도 한일 국교 정상화” 악역 자처
한일 간 역사 갈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현재 상황이 전에 없이 심각하게 비치는 이유는 갈등이 증폭하지 않도록 적기에 수습할 만한 ‘키맨’이 없어서다. 청와대와 외교부를 대신해 한일 양국을 물밑에서 조율하던 고(故)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김종필 전 총리와 같은 지일파 거물들이 사라진 지금 이들을 대체할 만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제3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박 전 회장은 생전 정ㆍ재계를 넘나들며 한일관계 개선에 힘쓴 ‘일본통’이었다.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돼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사전작업을 했던 그는 이후 한일청구권협정 자금을 지원 받아 포스코(설립 당시 포항종합제철)를 일궜다. 일본 정ㆍ재계와의 폭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1980년대에는 한일의원연맹, 한일경제협회 등을 이끌었다. 박 전 회장은 무엇보다 한일관계의 대전환으로 꼽히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ㆍ오부치 선언)’을 성사시키기 위해 물밑작업을 한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박 전 회장과 함께 김 전 총리도 한일관계를 위해 힘써 온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1962년 대일청구권 자금을 밀실 합의한 ‘원죄’는 있지만 김 전 총리는 당시에도 “제2의 이완용이 되더라도 한일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며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악역’을 자처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초대 회장직에 임명됐던 그는 김대중ㆍ오부치 선언 이듬해인 1999년 9월엔 국무총리로서 오부치 총리와 회담을 갖고 한일 동반자 관계를 확고하게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국회 일본통 의원들이 자취를 감춘 2000년 7월 다시 한일의원연맹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일관계의 ‘소방수’ 역할을 자처해 왔다. 김 전 총리가 별세한 지난해 6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는 “오랜 친구를 잃게 돼 참으로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한일 역사는 김종필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며 애도했다.
이러한 박 전 회장과 김 전 총리의 시대가 저물면서 우리 사회 내 지일파의 명맥도 끊기다시피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들이 회장을 역임했던 한일의원연맹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나 예전만 못하다는 게 중론이다. 현재 한일의원연맹에는 180여명의 의원이 소속돼 있으며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회장이다. 특히 최근 ‘일왕 사죄’ 발언을 한 문희상 국회의장이 한일의원연맹 회장 출신이라는 점이 일본을 더 자극했고 누카가 후쿠시로 일한의원연맹 회장은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문 의장 발언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한일의원연맹이 이제는 양국의 가교 역할보다는 항의와 불만을 표출하는 통로로 전락했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이기태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박 전 회장처럼 일본을 이해하고 고위급에 직접 접촉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사회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며 “한일 간 주요 소통 경로였던 한일경제인회의, 한일의원연맹까지 사실상 무력화된 상황에서 박 전 회장 같은 ‘귀인’이 나오기도 어려워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계의 지일파가 좀 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특히 한일 양국에서는 동아일보 재직 시절 도쿄특파원을 지내고 한일의원연맹 간사를 지낸 이낙연 총리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 이 밖에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별보좌관, 김기정 전 국가안보실 2차장 등도 일본과의 조율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문제는 최근 일본군 위안부 합의, 일본 교과서 문제 등으로 반일 감정이 한층 악화되면서 국내 지일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점차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태 위원은 “현재 반일 감정은 박 전 회장, 김 전 총리가 맹활약하던 김대중 정권 시대보다 훨씬 뿌리 깊어진 상태”라며 “한일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일본을 포용하는 것이 필요한데 과연 어떤 인사가 국민적 비난을 감수하고 ‘일본을 이해하자’는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고 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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