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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살아낸 게 악몽” 사학자 김성칠이 일기로 쓴 한국전쟁

입력
2019.04.08 04:40
수정
2019.04.08 09:59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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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소개됩니다.

1950년 10월 전쟁의 참화를 피해 떠나온 젊은 부부가 마산 장승포에 마련된 피난촌에서 갓난 아이를 돌보고 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한 자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0년 10월 전쟁의 참화를 피해 떠나온 젊은 부부가 마산 장승포에 마련된 피난촌에서 갓난 아이를 돌보고 있다. 미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한 자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인적인 기억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서울 도봉산 자락에 있는 도봉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1972년이었다. 이후 돈암동에 있는 용문중학교를 다녔고, 장충동에 있는 장충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의 쌍문동, 수유리, 돈암동, 혜화동, 동숭동, 종로 일대는 청소년 시절의 애틋한 추억이 서려 있는 곳들이다. 그래서 요즘도 동물원이 부른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인 ‘혜화동’을 더러 듣곤 한다.

돈암동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 정릉이 펼쳐진다. 대학 시절엔 8번 버스를 타고 정릉과 북악터널과 평창동을 거쳐 학교에 가곤 했다. 정릉을 지나갈 때 언제부턴가 떠오르는 지식인이 역사학자 김성칠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가르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났던 책이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다. 이 책의 주요 무대의 하나가 정릉이다. 정릉과 시내를 오가면서 그는 한국전쟁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역사 앞에서’는 그 부제인 ‘한 사학자의 6ㆍ25일기’가 보여주듯 ‘기록의 역사학’이다.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서 김성칠은 전쟁과 인간, 전쟁과 사회의 모습을 일기로 생생히 남겨뒀다. 그는 말한다.

“이 한여름을 살아낸 일을 생각하니 꿈같다. 꿈 중에도 악몽이다. (...) 동족상잔의 마당에 외세가 겹들어서 우리의 조국은 이제 무서운 살육과 파괴의 수라장으로 화하고 있다. (...) 설사 당장에 이 전쟁이 끝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얼 먹고 무얼 입고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인민공화국이 서울을 지배하던 1950년 9월 1일자 일기다. 비분강개가 흐른다. 광복을 이룬 지 3년 후인 1948년 남쪽에 대한민국이,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2년 후인 1950년 북한이 남한 지역의 전면적 침략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우리 사회를 폐허로 만들었고 짙은 상처를 남겼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한국전쟁은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의 하나였다. 김성칠은 ‘역사 앞에서’에서 이 전쟁의 비극과 일상을 중도적 역사학자의 눈으로 엄정하게 그려낸다. 그의 기록의 역사학은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의미를 가진다. 김성칠을 다루는 까닭이다.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의 가족 사진. 맨 왼쪽이 김성칠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역사학자 김성칠(1913∼1951)의 가족 사진. 맨 왼쪽이 김성칠의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김성칠의 생애와 학문

김성칠은 1913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보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돼 1년간 복역했고, 이후 일본 큐우슈우 토요꾸니중학에서 공부했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조선금융조합연합회에서 일하다가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역사학을 공부했다. 광복 후 1946년 경성대학을 졸업한 다음 동양사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다가 1947년 서울대 사학과 전임강사를 맡았다.

김성칠은 저작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조선역사’(1946)를 발표했고, ‘용비어천가 상·하’(1948)를 출간했다. 공저로 ‘동양사 개설’(1950)을 내놓았고, 한국전쟁 발발로 중단될 때까지 ‘열하일기’를 총5권으로 간행했다. 또 펄 벅의 ‘대지’와 강용홀의 ‘소설 초당’을 번역 출간했다. 이처럼 열정적이었던 그는 전쟁 와중인 1951년 고향 영천에 갔다가 괴한의 저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김성칠이 다시 나타난 것은 ‘역사 앞에서’의 출간을 통해서였다. 그의 아내인 국어학자 이남덕이 1993년 그가 남긴 일기인 ‘역사 앞에서’를 펴냄으로써 그의 삶과 학문은 다시 주목 받았다. 1945년 12월 1일부터 1946년 4월 22일까지, 그리고 1950년 1월 1일부터 1951년 4월 8일까지의 일기를 통해 그는 당대 현실을 기술하고 또 고뇌한다.

지식인이 자기 시대를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은 작지 않은 용기를 요구한다. ‘역사 앞에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2002년 그 일부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림으로써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2018년에는 그의 아들인 역사학자 김기협이 일기첩을 모두 되살리는 개정 보급판을 냈다.

한국 전쟁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서울 도심의 모습이다. 뉴욕타임스가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다. 태평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평시와 다를 바 없이 오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 전쟁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서울 도심의 모습이다. 뉴욕타임스가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다. 태평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평시와 다를 바 없이 오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전쟁 기록의 역사학

한국전쟁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진행된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했다. 첫째, 우리 사회 현대성 형성 과정에서 한국전쟁은 결정적 전환점의 하나를 이뤘다. 분단이 전쟁의 배경을 이뤘지만, 전쟁은 분단을 공고화시켰다. 냉전분단체제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진 우리사회 현대성의 구조적 조건을 형성했다.

둘째, 논쟁은 국제적으로 진행됐다. 전통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의 비판이 이뤄졌고, 다시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 가운데 특히 미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위시해 미국 캐스린 웨더스비와 우리나라 박명림의 연구는 화제를 모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원인보다 기원에 주목해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계급 갈등을 분석했다. 캐스리 웨더스비는 한국전쟁을 북한, 소련, 중국이 함께 계획하고 집행한 국제전으로 결론지었다. 그리고 박명림은 한국전쟁의 구조적 기원과 행위적 원인을 포괄적이면서도 미세하게 추적했다. 우리 학계의 자존심을 세워준 연구였다.

‘역사 앞에서’는 이런 연구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한국전쟁을 조명한다. 앞서 말했듯 ‘역사 앞에서’는 일기 형식으로 전쟁의 현실을 기록한다. 저작의 해제를 쓴 역사학자 정병준은 말한다. “이 일기는 시기적으로 1950년 6월부터 12월까지, 지역적으로 서울과 정릉이라는 서울 교외에서, 직업적으로 서울대 교수라는 최고 엘리뜨집단에서, 사상적으로 중도파이거나 늘 회의하는 지성인의 입장에서, 개인적으로 가솔(家率) 4명을 거느린 가장(家長)으로서 겪는 한국전쟁 전반기를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일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 다수는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때론 병을 치료받아야 한다. 김성칠은 이런 일상에 담긴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꿰뚫어본다. 9월 14일자 일기를 보면, “인민공화국의 모든 부분에 다 이렇듯 심한 관료주의가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정릉리의 인민병원은 그 유독 극심한 일례일는지 모르나 하여튼 모든 기업의 국영화는 좀더 연구하여야 할 문제”라고 정곡을 찌른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 상황은 역전됐다. 인민공화국 지배 아래서 이념 심사를 받았던 교수들은 이제 새롭게 구성된 위원회의 심사를 받게 됐다. 1950년 10월 9일자 일기는 그 심사위원회에 대한 교수회의를 다룬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기막힌 현실을 지켜보며 김성칠은 “문리대여, 너는 그러고도 대학의 대학임을 자랑하려느냐”고 탄식한다. 이념에 따라 부초처럼 흔들리는 당대 지식사회에 대한 엄정한 기록이다.

김성칠의 사상은 아내인 이남덕이 그를 기억하며 쓴 글인 ‘조국 수난의 동반자’에서 밝혔듯 중도주의다. 김성칠의 중도주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중도의 길은 광복 이후 한국전쟁까지 매우 협소했다. ‘역사 앞에서’는 중도적 관점에서 참담한 현실을 절망하고 고발하며 겨레의 미래를 염려하고 소망하는 당대의 역사를 증거한다. 더없이 소중한 기록의 역사학 저작이라 할 수 있다.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 표지. 창비 제공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 표지. 창비 제공

◇기억의 사회학으로서의 지성사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를 이 기획으로 다루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기억의 사회학’이다. 지난 100년 지성사에서 어떤 담론을, 어떤 지식인을, 어떤 시간과 공간을 기억해야 하는 걸까. 기억의 사회학이란 지나간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함의한다.

“삼월 삼짇날. 거센 항구의 바람 속에서 꽃은 피고지고. 피난꾼이 고달픈 살림살이 속에서 봄을 맞이하였다. 아내와 더불어 할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힘써 아이들에 관한 책을 읽고 번역하고 그러는 중에 우리도 붓을 들어서 적어도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에 비길 만한 하나는 후세에 남겨두자고.” ‘역사 앞에서’에서 나오는 1951년 4월 8일자의 마지막 일기다.

지나간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기억들을 간직해야 할까. 기억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 전쟁은 이념적 이분법을 강제한다. 우리 안에 도사리는 적개심을 부추기며, 결국 생각과 삶을 모두 파괴하고 만다. ‘역사 앞에서’가 안겨주는 기억의 사회학적 메시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넘어선 평화에의 염원일 것이다.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는 미래 100년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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