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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전 잃은 이재민 “앗, 뜨거워” 대피소서 자다가 깜짝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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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전 잃은 이재민 “앗, 뜨거워” 대피소서 자다가 깜짝 놀라

입력
2019.04.07 18:35
수정
2019.04.07 21:49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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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ㆍ탄식에 잠 못드는 강원 산불 이재민 대피소

대부분 몸만 빠져나온 고령자… 잿더미 충격에 상당수가 불면증

강원 산불 발생 나흘째인 7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한 이재민이 보급물품을 받아 텐트로 돌아가고 있다. 고성=서재훈 기자
강원 산불 발생 나흘째인 7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이재민 대피소에서 한 이재민이 보급물품을 받아 텐트로 돌아가고 있다. 고성=서재훈 기자

“맨발로 나오느라 보청기, 안경, 보행기도 챙기지 못했는데 좁은 대피소에서 언제까지 생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강원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산불 피해자 대피소에서 만난 김옥순(60)씨는 어머니 이중규(86)씨를 바라보면서 한숨부터 쉬었다. 지난 4일 밤 고성군 토성면 산골마을에서 혼자 생활하는 팔순 노모 집에 들렀다가 가까스로 어머니는 구했지만 급하게 탈출하는 바람에 가재도구는커녕 생활필수품도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노모는 평생을 산 집이 잿더미가 됐다고 걱정이지만, 자식들은 춥고 기댈 곳 없는 대피소 바닥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는 팔순 노모가 더 걱정”이라고 말했다.

강원 산불 발생 사흘째인 6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의 이재민 대피소에서 평생 살아 온 집을 잃은 이중규(86)씨가 딸 김옥순(60)씨와 대화하고 있다. 고성=정준기 기자
강원 산불 발생 사흘째인 6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의 이재민 대피소에서 평생 살아 온 집을 잃은 이중규(86)씨가 딸 김옥순(60)씨와 대화하고 있다. 고성=정준기 기자

지난 4일 발생한 강원지역 산불로 초등학교나 마을회관 등 21개 임시 거주시설에 머무르고 있는 이재민은 모두 700여명. 화마가 보금자리를 덮치는 바람에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재민들은 “평생 일궈온 모든 것을 잃었다”며 충격에 휩싸였다. 이재민 대피소가 마련된 강원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와 속초시 장천마을회관은 저마다 “그 쪽 집도 탔어?” 묻는 주민들의 탄식으로 가득했다. 대피소 인근 피해 신고 접수처는 산불 피해를 신고하기 위해 찾아온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대피소로 몸을 피한 이재민은 고령의 노인들이 상당수였다. 때문에 이재민의 건강 관리가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다. 천진초등학교에서 피해자 상담을 돕고 있는 홍인숙 정다운 심리상담연구소 소장은 “대피소를 찾은 이재민 20% 정도가 노인성 질환인 편마비 증세를 호소하고 있다”며 “보살필 가족이 없어 화장실을 다니기 힘든 분들 역시 많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화재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재민들의 건강 관리도 다급한 문제였다. 홍 소장은 “대피소에서 잠을 자다가 뜨겁다며 깨는 주민들이 적지 않은데다, 충격으로 말이 잘 나오지 않고 몸 곳곳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전했다. 천진초등학교 강당에서 의료 지원을 하고 있는 이승준 강원대병원장은 “불을 피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상, 가스로 인한 기침, 가래를 호소하는 피해자 말고도 정신적 충격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민들이 많다”며 정신적 증상이 상당기간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원 산불 발생 나흘째인 7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의료자원봉사자들이 이재민들의 건강을 확인하고 있다. 고성=서재훈 기자
강원 산불 발생 나흘째인 7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의료자원봉사자들이 이재민들의 건강을 확인하고 있다. 고성=서재훈 기자

대피소에는 이재민을 돕기 위한 온정의 손길도 전국 각지에서 답지하고 있다. 여러 민간단체와 공공기관, 기업에서 파견된 봉사자들이 대피소 앞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엄기인(62) 대한적십자사 고성지역협의회장은 이번 산불로 원항리 가옥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지만 자신의 피해복구를 뒤로 한 채 이재민 급식봉사를 위해 소매를 걷어붙였다.

피해복구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재민들의 근심은 여전하다. 특히 이재민 대부분이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터라 조만간 다가올 농사철이 걱정이다. 이강훈(55) 고성군 번영회장은 “구호물자도 고맙긴 하지만 당장은 농사가 걱정”이라며 “농기계 대여 등 주민들이 하루 빨리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장천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박만호(72)씨는 “이동식 주택이라도 있으면 다가올 농사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사정은 대피소 바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화마에 보금자리를 잃지는 않았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주민들의 호소가 비슷했다. 6일 저녁 천진초등학교 대피소를 찾은 주민 채옥순(52)씨는 “집은 무사했지만 지난 해 경작해 곧 납품을 앞두고 있던 20억원 상당의 농작물이 모두 타버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천마을 통장 어두훈(61)씨 역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안쪽 벽은 모두 타고, 전선이 녹아내려 거의 새로 지어야 하는 집도 많다”고 설명했다.

강원 산불 발생 사흘째인 6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이재민대피소에서 채옥순(52)씨가 자신이 가꾼 농작물이 불타는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성=정준기 기자
강원 산불 발생 사흘째인 6일 고성군 천진초등학교에 마련된 이재민대피소에서 채옥순(52)씨가 자신이 가꾼 농작물이 불타는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성=정준기 기자

정부와 지자체는 이재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초등학교나 마을회관에 임시 설치한 대피소의 열악한 환경을 감안해 이재민들이 인근 공공기관 연수원 등 보다 나은 시설로 옮길 수 있도록 협조한다는 방침이다. 40여명의 이재민이 생긴 장천마을의 경우 7일 모든 이재민들이 좁은 마을회관에서 인근 농협 수련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성ㆍ속초=정준기 기자 joon@hankookilbo.com, 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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