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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칼로레아, 교육 패러다임 변화 이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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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칼로레아, 교육 패러다임 변화 이끌까

입력
2019.04.29 04:40
수정
2019.04.29 16:29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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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청산될 수 없지만, 만약 용기를 가지고 마주하게 되면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공부했던 작품 중 최소 두 개의 작품이 어느 정도까지 역사와 대면했는지 서술하시오.” (국제 바칼로레아 ‘언어와 문학’ 평가 문항)

학교 시험이 모두 이 같은 서술형, 논술형 평가로 치러지는 국제 교육 프로그램, ‘국제 바칼로레아(IB)’가 국내에 상륙했다. 대구시교육청과 제주도교육청은 지난 17일 IB의 한국어화 협약을 맺고 국내 공교육 도입을 공식화했다. IB를 도입한다는 것은 곧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을 통째로 들여오겠다는 의미다. 제주는 올해 말까지 고등학교 한 곳을 지정해 시범운영에 나선다. 대구는 2021년까지 초등학교와 중학교 각 3곳에, 2022년에는 고등학교 3곳에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박구원 기자
박구원 기자

교육감들은 IB의 토론ㆍ프로젝트식 수업과 서술ㆍ논술형 평가가 ‘정해진 정답 찾기 교육’에서 탈피해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을 기르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강은희 대구교육감은 이 자리에서 “IB로 창의융합형 미래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했고, 이석문 제주교육감은 “근대 교육 100년사 중 가장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제 바칼로레아(IB) 한국어화 추진 확정 기자회견에서 강은희(왼쪽부터) 대구교육감, 아시시 트리베디 IB 아시아·태평양본부장, 이석문 제주교육감이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제 바칼로레아(IB) 한국어화 추진 확정 기자회견에서 강은희(왼쪽부터) 대구교육감, 아시시 트리베디 IB 아시아·태평양본부장, 이석문 제주교육감이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수능 안 보는 학교 가능할까

IB와 국내 교육과정의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단연 ‘평가 문항’이다. 통상 오지선다, 객관식 형태의 학교 정기고사나 수능과는 확연히 다르다. 2017년 저서 ‘대한민국의 시험’에서 IB 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혜정 교육과혁신 소장(교육학 박사)은 “역사 과목을 예로 들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시대순에 알맞게 나열한 것은 뭔가’라는 게 지금 우리의 시험 문제라면, IB는 ‘전쟁이 끝난 후의 평화합의가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한다는 주장에 대해 서술하라’고 나온다”며 “누군가 정해놓은 생각,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을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는 점에서 IB는 교육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강조했다.

IB는 본래 타국에서 공부하는 외교관 자녀나 주재원 자녀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의 ‘학력 인정’ 문제가 불거지자, 어디서나 균질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한 게 IB의 시초다. 따라서 주로 국제학교, 외국인학교에서 운영하며 75개국 2,000여개 해외 대학에서 IB 이수자들을 선발하고 있다. 국내 공교육에서는 유일하게 경기외고가 유학반을 대상으로 한 학급만 운영 중이다.

다만 국내 대학에 진학하려면 수능을 반영하는 전형에는 지원이 불가하다. 고등학교 과정(DP) IB최종 평가가 11월에 있어, 수능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도입되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나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없는 수시 전형으로만 대학을 가야 한다. 다만 도입을 확정 지은 교육청들은 수시 비율이 70%에 달하는 만큼, 학생들의 대학 진학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특히 고등학교에서 IB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수능 문제를 하나도 안 풀어주는 학교가 된다”며 “우리 대입에는 잘 안 맞지만 오히려 수능을 제쳐 놓고 운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수능 교육이나 정답이 있는 문제의 한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학교 유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 수도여고 3학년 학생들이 지난달 7일 올해 첫 전국연합학력평가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동작구 수도여고 3학년 학생들이 지난달 7일 올해 첫 전국연합학력평가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만병통치약 접근 경계해야

반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대구ㆍ제주지부와 일선 교사들은 IB 도입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전교조 제주지부는 성명을 내고 “IB가 오히려 대학 입시를 위한 특권학교로 운영될 수 있고 막대한 예산을 일부 학교에 지원하는 것은 학교간 불평등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IB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해당 학교는 스위스에 위치한 IB 본부에 일정의 로열티(연회비)를 매년 지급해야 하는데, 학교당 1,100만원 수준으로 예상된다.

교육계는 IB가 한국 교육의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전경원 전교조 참교육연구소 소장은 “2016년 IB 교육과정을 도입한 일본 센다이의 한 고등학교의 경우 IB 최종 이수자 비율이 신청자 대비 10%를 밑돈다”며 “IB를 성급히 국내에 ‘이식’하기 보다는 중도포기자 발생의 이유와 같은 IB의 장단점에 대해 충분히 연구할 때”라고 말했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한국은 수능과 같은 평가도구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입시 위주 교육과 과도한 사교육, 극심한 경쟁과 같이 본래 취지를 무력화시키는 교육환경이 문제”라며 “IB가 한국에 도입되면 IB 대비용 사교육 시장이 만들어질 뿐”이라고 말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대입제도에 민감한 학부모들이 생소한 IB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지 않고, 학교 입장에서도 일반 교육과정과 동시에 IB 과정까지 운영하려면 학사관리에 어려움이 예상되는데, 굳이 시범학교로 지정되기 위해 지원할 학교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우려다.

IB 평가 결과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도 추후 논란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 시스템이 평가의 타당성 보다는 형식적 공정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지선다형 문제 형태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당장 입시와 연결되기 시작하면 공정성 시비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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