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문정훈 칼럼] 미국 소주법과 우리 주세법 개정

입력
2019.04.26 04:40
29면
0 0
하이트진로는 5월 1일부터 ‘참이슬 후레쉬’와 ‘참이슬 오리지널’의 공장 출고가격을 병(360㎖)당 1,015.7원에서 65.5원 오른 1,081.2원으로 변경한다고 24일 밝혔다. 홍인기 기자
하이트진로는 5월 1일부터 ‘참이슬 후레쉬’와 ‘참이슬 오리지널’의 공장 출고가격을 병(360㎖)당 1,015.7원에서 65.5원 오른 1,081.2원으로 변경한다고 24일 밝혔다. 홍인기 기자

199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에서 흥미로운 법안이 하나 통과되었다. 이름하여 ‘소주법(Soju Law)’인데 배경은 이러하다. 미국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주의 식당에서는 술을 판매하려면 이에 맞는 주류판매 면허(Type 20)가 있어야 하는데, 이 면허는 식당에서 맥주와 와인의 판매만 허용한다. 이외의 도수가 높은 술, 예컨대 위스키, 보드카, 소주 등은 판매할 수 없다. 식당에서 이런 고도주(高度酒)를 판매하려면 다른 종류의 면허(Type 21)를 추가로 획득해야 하는데, 이 면허 가격이 수천만원에 달하기 때문에 주점을 제외한 미국의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이 면허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당시 캘리포니아 ‘한식당 사장 연합회’에서 캘리포니아 주의회를 대상으로 로비를 펼쳤다. 소주는 매운 한식과 떼어놓을 수 없는 전통적인 식사 문화의 일부이며 음식의 맛을 돋운다는 내용으로 주 의회를 설득했는데, 놀랍게도 이 논리가 먹힌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통과된 소주법은 와인과 맥주 판매 면허를 갖고 있는 식당에서 소주도 판매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 법안 통과 후 캘리포니아 주에서의 식당 음주 문화가 바뀌었다. 별도의 면허 필요 없이 도수가 높은 소주를 판매할 수 있게 되자 많은 식당들이 소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보드카 등 고도주가 들어가야 만들 수 있는 칵테일은 판매할 수 없었는데, 식당들은 소주법을 근거로 보드카 대신 소주로 칵테일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소주를 모르는 손님에게는 ‘한국의 라이트한 보드카’로 설명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일본식 소주인 ‘쇼츄(Shochu)’를 ‘소주(Soju)’로 둔갑시켜 수출하는 사례까지 나왔다.

이 법안으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증류주(미국 수출 증류주의 95%이상이 소주)가 1996년 190만불에서 1999년에 무려 330만불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에 이어 한인들이 많이 사는 주들을 중심으로 차례로 소주법이 통과되며 식당에 소주가 판매되고 있다. 이로서 한국의 소주는 명실공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증류주의 자리에 올라섰으며, 이 분야의 세계 1위는 하이트진로다.

초록색 병 소주는 언제부터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을까? 실은 소주고리로 내리던 전통식 소주와 지금의 소주는 전혀 다른 술이다. 전통식 소주는 주로 쌀로 만들지만 지금의 소주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저렴한 수입 전분을 쓰고, 초대형 연속식 증류기로 어마어마한 양의 순도 높은 알코올을 뽑아낸 다음 물로 희석시킨 후 감미료로 맛을 낸다. 실은 이런 희석식 소주 제조법은 1910년대 일본에서 처음 개발하여 상용화한 방식이다. 그리고 2차대전 때 쌀이 부족하자, 일제는 고구마 등 저렴한 전분으로 희석식 소주를 대량 생산해 일본과 한국에 공급하였다. 이것이 희석식 소주가 우리의 식문화에 비집고 들어오게 된 계기다. 이후 소주는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의 고된 삶을 위로하는 술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희석식 소주의 저렴한 가격의 이면에는 우리의 쌀과 과일을 원료로 하는 전통주 시장이 크게 쇠퇴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맥주 역시 소주와 경쟁하기 위해서 다양한 맛의 맥주를 생산하는 것 보다는 표준화된 대량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을 추구했다.

우리나라는 술에 세금을 매길 때 생산가격에 비례해서 부과하는 ‘종가세(從價稅)’ 제도를 갖고 있다. 반면에 대부분의 선진국은 알코올 함량에 비례하여 세금을 부과하는 ‘종량세(從量稅)’ 제도를 갖고 있다. 종가세 하에서는 좋은 원료를 쓰는 것이 어렵다. 원료비가 오르면 주세액도 함께 상승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량세 하에서는 좋은 원료를 쓸수록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더 비싼 원료를 쓴다고 해서 주세액이 더 오르지 않기 때문에 좋은 국내산 원료를 쓸 가능성이 올라간다. 모든 술의 원료는 예외없이 곡물, 과일과 같은 농산물이다. 술은 원래 농산물이며 술과 농업의 발전은 함께 한다. 좋은 와인은 좋은 포도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국가는 술에 대해 나름의 규제를 하고 있다. 국가 재정의 원천이며, 국민 건강과도 관련 있기 때문이다. 규제의 힘은 대단하다. 앞서 언급했던 ‘소주법’처럼 법률 조항이 살짝 바뀌니 술의 운명이 바뀌고, 산업의 판도가 바뀌며, 음주문화가 바뀐다. 최근 우리 전통주와 크래프트 맥주 산업이 성장하며 그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좋은 재료로 차별화를 꿈꾸고 있으나 여러 규제에 힘겨워하고 있다. 최근 우리 음주문화도 ‘부어라 마셔라’식의 음주 문화에서 다양한 술의 맛과 멋을 즐기는 쪽으로 변모하고 있다. 50년 만에 준비 중인 주세법 개편안은 세금의 문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전통주와 크래프트 맥주의 문화가 비로소 꽃피울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피기도 전에 바람에 떨어져 져버릴까? 관계부처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푸드비즈랩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