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代 단톡방 “강호동ㆍ유재석보다 나영석에 관심” 압도적
나PD 여행ㆍ힐링ㆍ먹방 ‘세계관’ 구축… 예능권력 PD로 이동
제작비 대비 높은 시청률, 예능PD 몸값 드라마PD보다 높아
서울 역촌동에 사는 조민숙(64)씨는 tvN 예능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을 즐겨 본다. 1주일에 2~3번 딸의 집에 가 손녀와 손자를 돌본다는 평범한 주부는 ‘스페인 하숙’ 제작을 나영석 CJ ENM PD가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조씨는 나 PD가 2000년대 후반 KBS2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2일’에 나와 얼굴과 이름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조씨는 “나 PD가 ‘꽃보다 할배’ 등 우리(노년)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찾아본다”고 말했다. 그는 “강호동, 유재석이 나온 것보다 나 PD가 만든 프로그램에 더 호기심이 간다”고도 했다.
◇강호동 유재석보다 나영석이 궁금하다는 시청자
노년인 조씨가 유명 연예인보다 예능 PD를 궁금해하는 게 특이한 현상일까. ‘강호동ㆍ유재석이 나온 프로그램과 나 PD가 만든 프로그램 중 어떤 것에 더 관심이 가나요?’ 조씨를 통해 그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 등 단톡방 네 곳에 같은 질문을 던졌더니 예상 밖 결과가 나왔다. 35명이 나 PD를 꼽았다. 강호동ㆍ유재석을 택한 4명보다 9배나 높았다. 응답자는 모두 60대였다. 시청자 사이에서 예능의 중심이 스타에서 PD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 PD는 연예인처럼 인간적 관심까지 받는다. 연예인 같은 PD, ‘피디테이너(PD+Entertainer)’의 등장이다. 피디테이너는 기존 PD와 달리 프로그램 카메라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MBC 간판 예능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을 13년 동안 이끈 김태호 PD등이 대표적이다. 황선혜 한국콘텐츠진흥원 일본 사무소장은 “PD가 카메라에 지속해서 노출되고 연예인과 얽혀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 잡은 피디테이너는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사례”라고 말했다.
◇창작자 취급 못 받았는데
대중문화에서 방송사 PD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작품이 성공해도 영광은 연예인과 작가에 돌아갔다.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로 통했다. 대본 없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창작자의 기획력은 조명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웃음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저급’하게 취급받던 시대적 분위기 탓이 컸다. 예능 PD의 위상은 영화감독과 드라마 PD에 비교해 현저히 낮았다.
1990년대 후반 지상파 방송사에 입사한 한 예능 PD는 “우리끼린 서로 궂은 일로 집안 먹여 살리는 장녀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시청자를 웃기면서 광고를 유치해 방송사 살림을 책임졌던 예능 PD들이 정작 조직 안팎으로 평가 절하되는 게 남아선호사상에 희생만 강요받고 집안에서 인정 받지 못하는 장녀들과 같다는 한탄이었다.
나 PD는 고루했던 방송사의 인식을 ‘세계관’으로 뚫었다. 나 PD하면 ‘여행’ ‘힐링’ ‘먹방(먹는 방송)’이 조건반사처럼 떠오른다. ‘꽃보다~’와 ‘삼시세끼’, ‘윤식당’ 시리즈를 만들어내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나 PD의 예능프로그램은 삶의 질 향상으로 옮겨간 시대정신과 맞물리면서 폭발력이 컸다. 답습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반복으로 ‘안식’이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확고히 구축했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은 “예능으로 세계관을 보여준 건 나 PD가 처음”이라며 “시청자들이 여느 PD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 데 나 PD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 나 PD는 시청자가 창작자에 눈을 돌리게 해 콘텐츠의 중요성을 환기했고, 이를 계기로 연예인 중심의 스타시스템에 균열을 냈다.
예능 PD의 두각에는 시대적 변화도 영향을 줬다. 찰나의 재미를 쫓는 ‘스낵컬처’로 대중문화의 흐름이 바뀌면서 예능 PD에 스포트라이트가 옮겨갔다. 인터넷에서 2~3분의 짧은 영상 소비에 익숙해진 세대들은 호흡이 짧은 예능 콘텐츠를 선호한다. 대중문화에서 창작자로 조명받지 못했던 예능 PD가 피디테이너로 떠오르게 된 배경이다.
◇예능 PD가 ‘성과급 1위’인 이유
2011년 종합편성채널(종편) 개국을 계기로 다매체ㆍ다채널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종편과 엔터테인먼트 그룹 CJ ENM은 예능 PD 영입에 열을 올렸다. 적은 제작비로 많은 화제성을 낳기에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예능프로그램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단기간에 채널 브랜드를 높이려는 전략과도 맞아떨어졌다.
피디테이너의 경제적 파급력은 컸다. 이달 초 CJ ENM 등 엔터테인먼트 상장사들이 공개한 5억 원 이상 고액 연봉자 중에 가장 많은 돈을 받은 PD는 나 PD였다.
나 PD는 지난해 CJ ENM에서 40억원을 받았다. 가수 아이유 주연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만든 김원석 PD(21억 7,000만 원)보다 높았다. KBS에서 ‘태양의 후예’를 만들고 CJ ENM으로 이적해 ‘도깨비’와 ‘미스터 션샤인’을 줄줄이 흥행시킨 이응복 PD(CJ ENM 계열사인 스튜디오드래곤 소속)는 고액 연봉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방송가에선 나 PD가 유명 드라마 PD들을 제치고 지난해 가장 많은 연봉을 받은 이유로 제작비 대비 높은 매출에 주목했다. 드라마 제작사의 고위 관계자는 “이병헌과 김태리 등 톱스타들이 출연한 ‘미스터 션샤인’은 제작비만 400억원”이라며 “대형 상업 영화 두 편을 방불케 하는 제작비가 투입돼 수익을 많이 내기는 어렵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나 PD가 받은 연봉 40억 원 중 38억 원은 성과급이었다. 톱스타 캐스팅 대신 자신만의 세계관이 녹아 들어간 예능프로그램으로 시청자를 TV로 불러모은 결과였다. 10년 넘게 콘텐츠 기획을 해 온 방송관계자는 “나 PD가 지난해 ‘윤식당2’ ‘알쓸신잡3’ 등으로 400억원을 CJ ENM에 벌어줬다는 얘기가 파다하다”고 귀띔했다.
나 PD는 지난해 CJ ENM에서 이재현 CJ그룹 회장(23억2,700만원)과 이미경 CJ그룹 부회장(26억4,000만원)보다 많은 돈을 받았다. 사주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슈퍼 회사원’의 등장이다.
피디테이너는 신자유주의로 접어든 국내 미디어 환경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상파 PD들은 창작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CJ ENM을 비롯해 SMㆍYG엔터테인먼트 등 기업으로 떠났다. 방송사가 100% 제작을 총괄하는 일본 모델에서 예능과 드라마 제작을 전적으로 외부 제작사에 맡기는 미국 방송 환경으로 가면서 빚어진 과도기의 풍경이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기업으로 둥지를 옮긴 예능 PD는 “이젠 예능프로그램에서 지상파의 가장 큰 경쟁력이었던 채널 영향력의 후광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제작비나 소재의 제약 없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정량(보수)평가도 제대로 받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창작자의 입김이 세지면서 PD는 더욱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전망이다. 10년 넘게 외주 제작사에서 일한 PD는 “나 PD가 CJ ENM과 계약을 끝내고 외주 제작사를 차린다고 하면 투자자들이 얼마나 몰리겠나”라고 반문하며 “PD가 방송사를 나와 홀로 제작사를 차려 콘텐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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