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성장, 정부 주도보다 시장의 힘 빌려야… 정부는 인프라 설치로 충분”
“최저임금을 가파르게 인상하면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이들을 훈련시키는 비용 부담을 질 수 없기 때문이죠. 정부 정책이 돕고자 하는 계층을 오히려 해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겁니다.”
거시경제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자 201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사전트(76) 미국 뉴욕대 교수가 문재인 정부가 견지하는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정책인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역효과가 우려된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문 정부의 또 다른 경제정책 기조인 혁신성장에 대해서도 “정부 주도보다는 시장의 힘을 빌려 민간의 혁신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
지난 25일 열린 ‘2019 한국포럼’에 참석하고자 방한한 사전트 교수는 포럼 전날인 24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정부의 섣부른 시장 개입은 정책 효과를 능가하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사전트 교수는 소수의 독점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상황이 아닌 한 저임금도 순기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저학력 노동자가 낮은 임금으로라도 일단 취업을 해 직무 능력을 키우며 자신의 가치(노동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기업들이 직무훈련 비용 부담을 꺼릴 정도로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올리면 취약계층은 물론이고 사회초년생인 청년층까지 실업과 저임금의 늪에 빠지게 된다고 그는 경고했다.
혁신성장에 대해 그는 “혁신이란 말 그대로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며 정부가 인위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어 “특정 분야를 점찍어 혁신 성과가 나올 거라고 예측하거나 기대하는 건 금물”이라며 “정부는 연구 개발을 위한 인프라를 설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사전트 교수는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에 대해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심각한 침체가 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내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에는 “결국 자국민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울대 강단에 서고 한국은행을 자문한 경험이 있는 ‘지한파’ 학자로서 그는 “한국 경제는 인적 자원이 뛰어나 대단히 낙관적”이라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은 최근 국민소득 3만달러를 돌파했지만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비관론도 제기된다.
“한국 경제에 대해선 대단히 낙관적이다. 한국 경제의 기본 역량은 인적자원, 즉 사람이다. 한국인은 매우 근면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인구 비중도 높다. 매우 가난한 국가에서 급속도로 발전해 기적적인 성장을 이뤘고, 혁신적이고 국제적으로 성공한 기업도 여럿이다. 어떻게 하면 계속 성장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항상 반복되는 주제다. 명확한 사실은 누구도 다음 시대의 성장을 주도할 요인을 예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일환으로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 저소득층 근로 여건을 개선하려는 정책을 취했지만 효과를 두고 논란이 적지 않다.
“정책을 면밀히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이 그 정책이 돕고자 하는 빈곤층을 해치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장을 소수 기업이 독점하는 상황이라면 최저임금 설정이 노동자 보호를 위해 중요할 수 있다. 반대로 시장이 경쟁적이라면 최저임금은 부작용을 유발한다. 실제 1970~80년대 유럽에서는 최저임금이 너무 높아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실업률이 높아졌다. 더구나 근로자는 실제 직업을 얻고 업무를 보면서 훈련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업 상태가 길어질수록 노동자의 생산성은 더 떨어진다. 저소득층을 지원하려 한다면 세금을 걷어 이전지출(반대급부 없는 정부지출)을 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혁신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또 다른 경제정책 기조다. 성장 주도 가능성이 있는 산업 부문을 정부가 집중 지원하고 규제를 해소해 혁신기업을 키우는 것이 골자다.
“넓게 보면 연구ㆍ개발 투자는 결국 미래성장 동력으로 연결된다. 많은 공학자와 과학자에게 충분한 인프라 투자를 한다면 성과를 얻을 것이다. 다만 ‘혁신’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고, 예측할 수 있다면 그건 놀라운 것이 아니다. 정부 지원은 중요하지만 혁신을 예단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나는 공학자가 아니라 수소차가 효율적인지 판단할 수 없지만, 시장 관점에서 보자면 수소차가 좋은 아이디어라면 빠르든 늦든 민간에서 적극 개발할 거라 본다.”
사전트 교수는 정부는 ‘적절한 정책’을 통해 시장과 영향을 주고받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예컨대 정부가 기후변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세를 매겨 화석연료의 사회적 비용 부담을 늘린다면 시장이 친환경 차량에 투자할 유인이 커질 텐데, 이런 정책이 바로 시장의 힘을 이용하는 적절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세계경기 침체 전망이 강화되고 있다. 미국, 중국 등 거대시장이 곧 침체기로 돌입하면서 한국도 이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상 경기는 순환하게 돼 있지만 성장에서 침체로 전환되는 시점이 언제일지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2008년 세계는 치명적인 금융위기에 직면한 바 있고 이후 10여 년간 계속 성장세를 이어왔다. 성장세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조만간 침체가 올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은데, 내가 보기엔 당시 침체가 너무 깊다 보니 반등 기간도 길어진 것이다. 물론 침체가 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다만 2008년과 같은 심각한 위기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 경제관료들이 적절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구사해 위기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공격적인 보호무역 정책이 글로벌 경기에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모든 국가와 무역수지 균형을 이루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은 경제학의 기본과 동떨어져 있다. 관세율을 높일수록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은 오히려 자국민이다. 사실 미국은 어느 정부든 2차 대전 이래 계속해서 관세를 무기로 무역협상을 벌여 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국도 관세를 낮추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장된 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진의를 읽기는 힘들지만 그조차도 큰 흐름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는 중국과 무역협상을 타결하길 원한다고 꾸준히 말해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금리 인상을 멈추며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로 돌아섰다.
“기준금리 수준이 여전히 낮은 상황에서 이렇게 되면 진짜 위기가 왔을 때 대응할 무기가 없다. 스스로를 충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미국 경제가 성장세인 만큼 이럴 때 금리 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보유 자산도 축소할 수 있어야 한다. 금리 인하와 양적 완화를 요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흔들기는 우려스럽다. 물론 나는 연준 전문가들의 판단을 믿는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토마스 사전트 교수는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분야 전문가로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에 반대하는 주류 성향 경제학자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과 거시경제 변수 사이의 인과관계를 ‘합리적 기대 가설’에 입각해 실증적으로 풀어낸 공로로 201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합리적 기대 가설이란 경제주체가 정부 정책에 맞춰 합리적으로 자신의 선택을 바꾸기 때문에 정부의 경제 개입 효과는 기대보다 미미하다는 이론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뉴욕대 스턴경영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6년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고문교수를 지냈고 2012~13년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친 바 있어 한국과도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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