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고 아래 쪽방] <2>벗어날 수 없는 쪽방의 굴레
대부분 기초수급비로 월세 마련… 쪽방 탈출커녕 자칫하면 노숙자 신세
10명 중 3명은 15년 이상 장기 거주… “몸이나 안 아팠으면 좋겠어요”
“6년간 바둥바둥 300만원 모아 지하 쪽방서 1층 쪽방으로”
“화장실은 방에도 건물에도 없어 이 앞 공원 간이화장실을 써요. 제대로 걷질 못하니 팔로 기어가야 하는데, 비 오는 날이면 막막해요. 그럴 땐 최대한 참아야지. 그 정도 불편은 이제 받아들이는 거죠. 짜증을 내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당뇨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잃은 이명주(가명ㆍ57)씨. 요의(尿意)를 참는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익숙할 수 없는 어려움이지만, 12년간 이어진 쪽방 생활로 온갖 기막힌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 터였다. “말이 그렇지 누가 이런 곳에 살고 싶겠어요. 벗어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봤는데 아직 이 자리더라고요.”
쪽방에 산다는 건 4.13㎡(1.25평ㆍ보건복지부 정의의 중간값) 남짓한 작은 공간에 ‘몸을 누인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난방, 냉방, 상하수도, 보안, 방재, 방음 등 흔히 집으로 부르는 곳이라면 어설프게라도 갖춘 그 모든 시스템이 배제된 공간에서 ‘버틴다’는 뜻이다. 따뜻한 물은 고사하고, 찬물만 나오는 수도나마 세입자가 이사를 오며 직접 공사해 달기 일쑤다. 이런 방을 타인에게 ‘집’이라고 내주고 매달 세를 받아도 책임을 묻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서울시가 지난해 ‘서울시 쪽방 밀집지역 건물실태 및 거주민 실태조사’에서 파악한 평균 월세는 22만8,188원이다.
이런 삶이 기꺼울 리 없지만 대부분의 주민은 한 번 들어온 쪽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2,144명)의 28.3%는 ‘쪽방에 15년 이상 거주했다’고 답했다. 주민 10명 중 3명은 15년 넘게 화장실도, 상하수도도 없는 방에 몸과 마음을 욱여넣어 맞춰오고 있다는 얘기다. ‘5년 이상 15년 미만’으로 거주했다고 밝힌 응답자도 39.8%나 됐다. 이렇게 15년 넘게 쪽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주민 응답 비율은 2016~2018년 사이 매년 24.2%, 26.4%, 28.3%로 꾸준히 커지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각종 주거대책이 늘어가는 추세는 이들의 삶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 셈이다.
떠나기는커녕 쪽방의 월세나마 마련하면 다행인 생활이 이어진 탓이다.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악화 일로를 치달아, 일이 끊기는 경우가 잦다. 기신기신 보증금도 모아 봤지만, 각종 공공임대 사업의 문턱은 턱없이 높다. 쪽방 주민은 “벗어나기는커녕, 노숙을 면하려고 쪽방에서 악착같이 버티기도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의 한 쪽방에서 21년을 버텨 온 박선기(가명ㆍ62)씨와 용산구 동자동 쪽방에서 12년째 분투 중인 이씨를 지난해 말부터 수 차례 만나 ‘쪽방에 산다는 것’에 대해 들었다. 이들이 말하는 쪽방은 노숙으로 밀려날 수만은 없어 안간힘을 다해 붙들고 매달린 벼랑 끝이자, 너무 고달파 딱 한발만 올라서려 해도 결코 그럴 수 없는 족쇄였다.
◇숨 쉬는 것조차 고된 방
“여기서 나가면 노숙자 신세밖에 안 되니 쪽방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죠.” 올해로 21년째 쪽방에서 사는 박씨는 다소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무기력하게 지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봄을 맞이한 그의 목소리에는 생명력이 넘쳤다. 겨우 내내 쪽방에서 웅크리고 있었지만, 완연한 봄 날씨에 쪽방 이웃들과 함께 골목에 모여 수다 삼매경에 빠진 그였다. 지역의 쪽방상담소에서 일자리를 얻어, 최근에는 이틀에 한 번 일도 나간다고 했다. 지난 겨울 한파는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1인용 전기매트에 의지해 이겨냈다. 7명의 목숨을 앗아간 ‘국일고시원 화재’ 때는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노심초사하며 TV 뉴스를 챙겨봤다. 그가 기억하는 지난 겨울은 ‘고역’이었다.
“보일러는 없다고 보면 돼요. 그래도 10년 전까지는 보일러를 틀어 줬었는데, 갑자기 기름값이 올랐던 해부터 난방을 전혀 해주지 않고 있어요.” 박씨가 사는 곳은 겉에서 봤을 때는 2층짜리 다세대 건물. 명목상으로 OO여인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도를 중심으로 쪽방이 촘촘하게 채워져 있어 영락없는 쪽방 건물이다. 공동 수도는 야외나 다를 바 없는 곳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온수는 언감생심이다. 집에서 씻고 생활할 수 없어 5분 남짓 걸어 100m가량 떨어진 공용 시설에서 세면과 샤워 등을 해결한다. 다가올 여름이라고 생활이 녹록할 리 없다. “방에 있을 수도, 나가 있을 수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에요. 방에는 불을 켜지 않고는 지낼 수 없고, 작은 창을 열면 바로 옆집 벽만 보이는데다 그 창으로 바퀴벌레가 엄청나게 들어오거든요. 에어컨은커녕 환기도 시킬 수 없는데 방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죠. 집주인이 그런 걸 달아줄 리 없어 임시방편으로 환풍기를 달았어요.”
이런 집에 그는 월세 25만원를 납부한다. 지난 겨울까지 22만원이었지만, 건물주는 물가가 올랐다며 최근 10% 인상분을 갑자기 통보했다. 박씨는 매달 받는 주거급여 23만3,000원으로 월세를 충당해 왔는데, 이제 그마저도 부족한 상황이다. 탈출하긴커녕, 이곳에서나마 겨우 버텨 온 게 21년째다.
◇일자리 가깝고 온정 몰리는데
“이사는 고사하고 몸이나 안 아프면 좋겠어요. 통장에 조금의 예금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기라도 하면 말 그대로 생활에는 ‘비상’이 걸리니까요. 일용직을 다니며 입에 풀칠해 살았는데 지난 겨울 몇 개월 동안 어깨가 아파 일을 못했더니 그나마 모아놓은 돈을 까먹은 거죠.”
경기 의정부시에서 아버지와 농사를 짓던 그는, 중국집 배달일, 주방일, 고기잡이 배 승선 등을 거쳐 1987년부터 2001년까지는 전남 완도 김 양식장에서 일하는 등 늘 쉬지 않았다. 오직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이겨낸 세월이다. 더 많은 일거리를 찾아 향한 서울 시내 쪽방촌에 자리 잡은 때는 2001년. 일용직 잡부로 일당 5만~6만원을 받으며 일하다가, 옆방 아저씨에게 목수일을 배우면서는 제주, 경상, 충청 지역을 오가며 더 큰 무대에서 뛸 수 있었다. 일당도 12만, 13만원으로 뛰어 꿈에 부풀던 때다.
한 사람 겨우 누울 쪽방에서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가정을 이룬 시절도 있었다. 30세였던 1987년 돈을 벌러 전남 완도에 갔다가 만난 어린 부인과 1999년 5월 31일 혼인 신고를 했던 것. 매일 막노동을 하는 처지였지만 쪽방 한 칸마저도 ‘집’이라고 부르며 사는 재미가 있었다. “예식도 못 올리고 산다”는 박씨 부인의 말을 들은 쪽방상담소가 2005년에는 결혼식도 치러줬다. 쪽방상담소에서는 종종 쌀과 김치 등을 나눠주는데, 이런 온정이 쪽방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 시절 기억은 생생해요. 결혼식을 하고, 설악산에 2박3일 신혼여행도 갔죠. 여러 기업에서 세탁기와 냉장고도 선물로 줬던 거로 기억해요. 그런데 쪽방에 어디 둘 데가 있나요. 다른 사람들이랑 다 같이 사용하다가 고장 나서 버렸어요. 와이프가 4년 뒤 ‘같이 못 살겠다’며 집을 나갔지만, 여전히 근처 쪽방에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쉬지 않고 일하며 늘 ‘한 발짝 진전’을 꿈꿨지만 마음같이 되지 않았다. 중국 동포들이 인력 시장에 대거 몰려들면서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었고, 기본 냉난방도 되지 않은 집에서의 생활은 몸과 마음을 늘 병들게 해 자리가 있어도 아파 일을 나가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
“연락은 끊겼지만 지난해 대학생이 됐다던 아들도, 아직 쪽방에서 산대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난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어요. 임대주택을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보증금이 5,000만원이라는 말에 포기했어요. 간다고 해도 월세를 내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임대주택이 많은) 경기 지역에서 이 동네 인력사무소까지 나올 방법도 없어요. 막상 이사를 가놓고도 외롭고 적응 못해서 맨날 여기 쪽방상담소에 와 있는 사람도 많아요.”
그의 방 책꽂이에 ‘가난의 시대-대한민국 도시빈민은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밖에 나갔다가 주워왔는데 읽지는 못했다”고 했다. 박씨는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을 묻자 단 두 조건을 떠올렸다. “햇빛을 볼 수 있는 집, 씻을 수 있는 집. 이 동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 일 거예요.” 하지만 한 편에 품은 희망 대신 마음을 가득 차지한 건 노숙에 대한 공포다. “이제 겨우 60 넘었는데, 사실 가장 큰 걱정은 나중엔 결국 노숙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에요. 벌어놓은 건 없고 일은 못 하고 그러니까요. 과연 이 방에서나마 끝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임대주택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
비 오는 날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참는다는 이명주씨는 박씨처럼 버티는 것마저 쉽지 않아 더 간절히 ‘탈출’을 시도한 경우다. 두 다리가 절단된 채 화장실도 세면장도 없는 방에 사는 그에게 매일 눈을 뜨는 건 그 자체가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생각지 못했던 인생의 불행이 겹겹이 밀려들기 전에는 그도 번듯한 사업체의 대표였다.
“중장비 대여 사업을 했는데, 1997년에 부도나면서 가족과 헤어지고 거리생활을 시작했어요.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었고, 정신차리고 일용직으로 일을 하면서부터는 고시원에 월세를 내고 살았어요. 그런데 일을 못하는 날도 생기다 보니 방값을 밀리고, 고시원 찜질방 만화방 등으로 계속 지내는 곳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 거죠. 12년 전에 이 동네(동자동 쪽방촌) 방값이 싸다고 하기에 이 근처 여인숙에 살기 시작했어요.”
여인숙 형태의 쪽방에서 5년, 반지하 쪽방에서 6년을 버티는 동안 당뇨합병증으로 번진 골수염 탓에 두 다리를 잃었다. 화장실을 한번 가고 싶을 때마다 상체로 기어 반지하 방을 빠져나와야 하는 고통은 자주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단단히 붙들고 그나마 나은 쪽방으로 가기 위해 보증금 300만원을 악착같이 모았다.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 것에서, 월세 내고 식비와 약값을 쓰고, 채무도 계속 16만8,000원씩 매달 갚아 나가는 중이에요. 사실 환상통(幻想痛ㆍ사라진 장기나 팔다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고통을 겪는 병증) 때문에 응급실에 한 달 2,3번 실려가는데 비급여 항목이다 보니 큰 돈이 들어가요. 다른 분들은 ‘그거 보증금 300만원이 뭐?’라고 할지 몰라도, 사실 이 상황에서 돈을 남겨서 모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데 저로서는 6년간 이를 악물고 모은 거에요.”
그는 애면글면 모은 300만원 덕에 6개월 전 반지하 생활을 면하고 1층으로 올라왔다. 전보다 나아진 점은 휠체어를 1층에 둘 수 있다는 것, 화장실을 갈 때 적어도 계단을 기어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 정도다. 허술한 벽 사이로 옆 방의 소리가 새어 들어오고, 화장실과 부엌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는 이 방 월세로 매달 28만원을 낸다. 반지하 방에 내던 방값은 보증금 없이 월 20여만원 정도. 이씨가 지상으로 거처를 옮기는 데 들어간 값은 그에겐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목돈이었다.
“떠나는 것이 목표지만 일단은 돈이 없죠. 각 지자체의 매입임대주택 보증금은 보통 수백만원 단위인데 아직 마련하지 못했고, 전세임대도 어렵더라고요. 한 번은 후암동에서 집까지 구하러 다니고, 온갖 서류를 떼고 집주인 동의까지 얻어 전세임대를 다 알아봤는데 집주인이 요구하는 보증금(1억2,000만원)과 LH공사의 기준 금액(8,000만원)이 맞지 않아 마지막에 포기했어요. 그래도 언젠간 이사를 가고 싶어 월 5만원씩 꼭 모으려고 합니다.”
지난해 서울시 실태조사에서 응답자(2,144명)의 64.7%는 정부 지원 임대주택을 신청한 적이 없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보증금 등 입주 비용이 없어서’(49.8%)가 가장 많았다. 이주하더라도 인력사무소 등이 멀어 이주 후 생활할 방법이 없다(18.8%)는 답도 적지 않았다.
◇복지사각 놓인 미등록 장애인
상황이 이런데도 이씨는 “그나마 제 사정은 나은 편”이라고 했다. 장애 증상이 뚜렷한데도 장애 인정을 받지 못한, 소위 ‘미등록’ 상태라 기초적 도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이 체감하기로 이웃 주민의 15%에 달한다는 것이다.
“한 3년 전 이사 온 이웃 분만 해도 그래요. 뇌를 다쳐 혼자서는 정상 거동도 생활도 판단도 불가능한데, 너무 거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치료 등 근거 자료가 없어 계속 장애 등록이 안 되더라고요. 혼자 있으면 자꾸 집이 쓰레기장처럼 변하고, 집을 못 찾아 오기도 해요. 결국 마을 주민회가 나서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분을 지키는데, 다들 성치 않은 사람들이 곁에서 보살피는 상황인 거죠.”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쪽방 주민 중 ‘장애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016~2018년 22.8%, 27.5%, 29.7%로 계속 늘고 있다. 이 중 ‘등록되지 않은’ 장애인의 비율은 2016~2018년 35.5%, 37.5%, 31.7%로 3분의 1수준에 육박한다.
이씨는 “다행히 활동보조인이 (이씨에게)매일 와 반찬을 만들어주시는데, 미등록(장애인) 상태인 주민들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생활이 하나에서 열까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어두운 공간, 취약한 공간에 사는데다, 몸과 마음이 많이 다쳐 있고, 알코올 문제에도 취약하다 보니 거리에서 길을 잃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이런 이웃들을 보면서 “과연 이런 모든 삶이 우리가 방치해도 좋은가라는 생각을 자주한다”고 덧붙였다.
한참 이웃들 걱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이씨는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제가 아이들과 아주 어릴 때 헤어졌잖아요. 평생 고생했을 게 뻔한데, 너무 그리워도 아버지라고 나타나서 이런 모습 보이긴 싫거든요. 그냥 잘 지내기만을 기도하고. 내가 남은 생을 아빠로서 나름대로 걔네들한테 부끄럽지만은 않게 살다 가자는 게 목표예요. 어떻게든 버텨서 더 나은 곳으로 가보고, 이웃들한테도 할 수 있는 봉사가 있으면 하고. 그게 헤어진 애들에 대한 최소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버텨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사는데 쉽지는 않네요.”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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