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에즈라 밀러 사전
신발을 벗은 채 이를 악물고 드럼을 질주하듯 연주했다. 그는 터지기 직전 화산 같았다. 결국 끓어오르는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드러머는 밴드의 노래 ‘스트레이티 페리’를 연주할 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오른팔을 흔들며 관객의 열기를 돋웠다. 지난 4일 서울 광진구 예스24라이브홀. 무대에 오른 미국 유명 배우인 에즈라 밀러(27)는 영락없는 로커였다. 영화 ‘신비한 동물’ 시리즈에서의 수줍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발 벗고 드럼 치는 할리우드 스타
밀러는 자신이 이끄는 인디 밴드 선즈 오브 언 일러스트리어스 파더 공연으로 한국 관객과 만났다. 2009년 1집을 낸 뒤 한국에서 연 첫 정식 공연이었다. 밀러는 드럼과 키보드를 번갈아 연주하며 노래까지 했다. 그는 이날 ‘올 어폴로지’를 절규하듯 불렀다. 1990년대를 풍미한 미국 유명 록밴드 너바나의 노래였다. 밀러는 너바나의 팬으로 유명하다. 그는 16세 때 ‘커트 코베인(너바다의 리더) 기타’를 손에 쥐기도 했다. 한국에선 ‘멀더 요원’으로 친숙한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2008년 미국에서 방송된 드라마 ‘캘리포니케이션’에 출연할 때 밀러에게 준 선물이었다.
밀러는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 중 한 명이다.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로 유명한 작가 조앤 롤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2018)를 비롯해 DC코믹스의 영화 ‘저스티스 리그’(2017) 등에 잇따라 캐스팅돼 몸값을 올렸다. 밀러는 DC코믹스 속 만화 캐릭터인 플래시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플래시 포인트’의 개봉(2020)을 앞두고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2011)에서 에바(틸다 스윈튼)의 아들 케빈으로 나와 섬뜩한 연기로 관객과 평단 모두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의 변화다.
◇언어장애로 어려서 따돌림받던 소년
밀러가 스타덤에 오른 방식은 독특하다. 그는 영화에서 주로 약자를 연기하며 다양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마 왓슨이 출연한 청춘 영화 ‘월플라워’(2013)에서 밀러의 별명은 ‘너싱(nothing)’이었다. 주변에서 없는 사람 취급당한 그가 맡은 역은 성 소수자였다. 블럭버스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비한 동물’ 시리즈에선 학대받는 마법 소년으로, ‘저스티스 리그’에선 아버지 없이 자란 결핍의 영웅으로 나온다. 작품에서의 모습은 그의 외로웠던 유년 시절과 닮았다. 밀러는 어려서 언어장애로 따돌림을 받았다. 말 더듬는 걸 극복하기 위해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를 배웠다.
성인이 된 밀러는 영화에서와 달리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는 5년 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 여성 폭력 반대 1인 시위를 했다. “여성 혐오가 우리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며 거리로 나섰다.
밀러에게 창작 활동은 차별의 벽을 허무는 투쟁의 연장선이다. 밀러는 밴드 멤버들과 2017년 노래 ‘유에스 게이(U.S. Gay)’를 발표했다. 2016년 미국 올랜도에서 벌어진 동성애 클럽 총격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그는 미국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퀴어(Queerㆍ성소수자)”라고 밝힌 바 있다. 성 소수자인 그는 무대에서 획일화된 성 관념을 허문다. 밀러는 한국 공연에서 상의는 정장을, 하의는 치마를 입었다. 남녀의 구별이 없는 ‘젠더리스’ 의상이었다.
밀러는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2013년 북극에 가 스키를 타는 퍼포먼스를 했다. 지구 온난화로 얼음이 녹아 내리는 위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내한공연 하루 전인 지난 3일 한국일보와 만난 밀러는 “지금 우리 사회는 전기 같은 에너지 사용에 있어 환경적으로 실패한 부분이 있다”며 “어떻게 건강하게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밀러는 인디 뮤지션과 환경 운동가, 퀴어, 할리우드 스타란, 자신을 둘러싼 결이 다른 이미지를 만들고 엮어 가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유명인”(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으로 성장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겨울 ‘밀러는 우리가 지금 필요한 영웅(Queer actor Ezra Miller is the hero we need right now)’이란 제목의 칼럼을 내 그의 행보에 주목했다.
◇농장에 사는 ‘염소 9마리’ 가장
어디로 튈지 모를 엉뚱함은 밀러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주류에서 활동하는 젊은 배우는 미국 북동부 버몬트의 농장에 산다. 95에이커(약 10만평ㆍ38만㎡)가 넘는 초원이다. 밀러는 이곳에서 블루베리를 키우고, 염소를 기른다. 그는 9마리 염소 가족의 ‘가장’이기도 하다. 밀러는 기자와 만나 “젖병을 물려 (염소 9마리를) 키웠다”며 웃었다. 그는 “자연에서 식물과 동물이 태어나고 죽는 걸 보면서 많은 성찰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밀러의 한국 사랑도 각별하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서 밀러와 함께한 배우 수현에 따르면 밀러는 한국 관객을 만나고 싶다며 직접 사비를 털어 지난겨울 한국을 찾아 관객과 깜짝 이벤트를 했다. 이번이 세 번째 방한인 밀러는 ‘한국 아빠’까지 만들었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음악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씨였다. 김 씨는 본보에 “몇년 전 밀러가 음악인들과 함께 가게를 찾아 음악적 교감을 맺었다”며 “상대에 대한 존중과 (다른 해외 아티스트와 달리) 한국 문화를 깊이 느껴보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순수 예술을 향한 열망이 커 보였다”고 했다. 밀러는 “(김씨가) 만나면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준다”며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눈물이 나더라”며 웃었다. 밀러는 한국 아빠를 이날 공연장에도 초대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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