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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동생은 11세 때 만세운동, 형은 지하투쟁… 그들은 ‘동지’였다

입력
2019.05.21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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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오기영 가족의 독립투쟁기 

[저작권 한국일보] 오기영 선생의 외손녀 김민형(왼쪽) 한국외대 교수와 막내 딸 오경애(오른쪽)씨, 오씨의 남편 김한주(가운데)씨가 오기영 일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지켜보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오기영 선생의 외손녀 김민형(왼쪽) 한국외대 교수와 막내 딸 오경애(오른쪽)씨, 오씨의 남편 김한주(가운데)씨가 오기영 일가의 독립운동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지켜보고 있다.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종종 인용하던 ‘백족지충 지사불강(百足之蟲 至死不僵)’이란 구절이 있다. 다리가 100개 달린 벌레는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직 운영이나 대외투쟁을 하면서 ‘머리’의 뛰어남에 집착하기보다, ‘다리’를 이루는 민중과 개인의 저력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독립운동 현장들에서 빛을 낸 유명 영웅들의 활약만이 해방의 저력을 키운 것은 아니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장삼이사. 혹은 평범한 일가(一家)의 드러나지 않은 희생이 또한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국가의 밀알이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대중과 학계에는 일제강점기 동안 활약한 언론인, 그리고 월북 지식인으로 주로 알려진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ㆍ1909~?) 선생의 일가 또한 그랬다. 그나마 그의 수기 ‘사슬이 풀린 뒤’가 출간(1948년) 54년만인 지난 2002년 복간되면서 선생의 가족들이 겪은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조각들이 조금이나마 세상의 눈에 들 수 있었다. 이달 발간된 ‘동전 오기영 전집(전 6권)’과 오기영 선생의 후손들이 십 수년간 그러모은 일제경찰 조서와 당시 보도 신문 등 관련 자료, 그리고 선생 혈육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역사의 한구석에 갇혀 오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오기영 일가의 독립운동기를 소개한다.

오기영(가운데) 선생이 1947년 김정순과 재혼 후 창경궁 나들이에서 촬영한 가족 사진. 오경애씨 제공
오기영(가운데) 선생이 1947년 김정순과 재혼 후 창경궁 나들이에서 촬영한 가족 사진. 오경애씨 제공

 

 ◇“친일파 때문에 독립 안돼” 일갈한 소년 

오기영 선생 가족의 독립운동기는 1919년 3월 고향 황해도 배천읍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비롯됐다. 일가의 독립운동기를 담은 이 수기(사슬이 풀린 뒤)에 따르면 만세운동 주도자인 아버지(오세형)가 오라에 묶여 해주감옥으로 끌려간 후, 11세의 어린 오기영은 태극기를 내놓으라는 교장 선생님에 맞서 창동학교 급우들과 “교장 선생님 같은 친일파 때문에 독립이 안 된다”고 소리쳤다. 어른들을 따라 만세를 부르다 끝내 경찰에 붙잡힌 오기영 일행은 닷새간 매를 때리며 뒤를 캔 일경에게 “김덕원 선생이 시켰다”는 가짜 자백을 하고서야 풀려났다.

오기영 선생의 수기는 자신의 사례뿐 아니라 민초들의 목숨을 건 만세운동이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었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죄가 있는 사람이 경하다는 벌로 볼기 구십도(九十度ㆍ구십대)를 맞는 것이다. 하루 삼십도씩 사흘에 맞는 법이다’고 표현될 정도로 만세를 부른 사람들을 족치는 일경들의 무자비한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아니, 아니, 마저 맞읍시다. 자식을 치면 죽소, 내가 맞읍시다’는 문장에선 죽음을 무릅쓰고 자식의 매질을 대신 받아내는 민초의 부정(父情)이 드러났다. ‘사슬이 풀린 뒤’의 경우를 사례로 ‘해방 직후 수기문학의 한 양상’을 쓴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일종의 3ㆍ1운동 생활사를 그려냈다”라며 “3ㆍ1운동에 실제로 참여하고 목도한 사람들의 형편과 내면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기록”이라고 평했다.

오기영 선생은 유년기 만세운동 참여, 흥사단 활동, 도산 안창호 선생과의 각별한 인연 등으로 독립운동의 족적을 남겼지만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1931년 국내 첫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의 스토리를 발굴하는 등 언론인과 평론가, 작가의 색채가 더 강한 인물이었다. 서울에 머물던 1949년 6월 고향으로 월북하면서 이후 김일성 정권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조국전선’ 주필 등을 지낸 후 60년대 이후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돼 지금으로서는 독립운동과 관련해 서훈 대상이 되지 못한다.

1934년 9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오기만의 사진.
1934년 9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오기만의 사진.

 ◇‘거지꼴’로 나타난 레지스탕스, 오기만 

이러한 오기영 선생의 일생과 달리 형 오기만(吳基萬ㆍ1905~1937) 지사는 15세에 만세운동을 한 이후 줄곧 중국과 국내에서 일제에 오래도록 맞선 인물로, 사회주의자였지만 광복 한참 전인 1937년 옥고여독 끝에 순국해 서훈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애국장 서훈은 ‘사슬이 풀린 뒤’의 복간이 이뤄진 2003년에야 뒤늦게 주어졌다.

오기영 선생의 저작물과 일경의 조서 등으로 가늠할 수 있는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사실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오기영 일가 독립운동사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혈육 대다수가 북한에 뿌리를 내려 기록이나 증언이 흩어지면서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해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주무대도 평양과 평안남도 진남포 일대여서 유족들이 그의 관련 기록을 샅샅이 뒤져 정부에 서훈신청을 하기 전엔 오 지사의 흔적은 일부 연구가들의 서가를 오갈 뿐이었다.

17세의 오기만은 서울로 유학해 배재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해삼위(海蔘威ㆍ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인 친구 이남식의 여행권을 빌려 중국 행을 결행했다. “중국 넓은 천지로 가서 일본식이 아닌 교육을 받고 거기 있는 우리 망명객들의 지도를 받고 그럭해서 나는 장차 독립운동에 몸을 바칠 생각”이라는 말을 뒤로한 채였다. 오기영 선생의 기록들에 따르면 오기만 지사는 국내로 돌아와 머물다 24세 때(1928년) 종적을 감추고 3년 뒤인 1931년 평양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일보(1928년 4월 28일자)는 오기만 지사가 배천지방 신간회(新幹會) 설립대회 사건과 관련돼 연백경찰서에 검속되면서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졌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평양에서 동생 오기영과 조우한 오기만은 차림이 거지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한기형 교수는 이를 놓고 “지하활동을 위해 변장을 한 것이다. 이때 오기만은 이미 지하운동의 지도자가 됐다”고 밝혔다(2005년, 해방 직후 수기문학의 한 양상). 중국에서 김구, 조봉암, 안창호, 김형선 등과 교류한 오기만은 사회주의운동가 김단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 200원을 받아 국내에 잠입한 상태였고, 진남포 적색노동조합부두위원회 조직 등 혐의로 일제의 추적을 당했다. 결국 1934년 4월 오기만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후 국내로 압송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같은 사실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일제경찰 조서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 오기만의 취조에 관한 건(1934년 8월 22일)’에 적시되어 있다.

오기만 지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중병을 얻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해 동생 오기영 부부의 간호를 받다 1937년 고향집에서 순국했다. 그의 알려진 유언 한 토막은 이렇다. “일본놈을 게다짝만 들려서 조선땅 밖으로 내몰지 못하고 죽는 게 원통하다. 압박받는 민족의 해방을 못 보고 죽는 게 분하단 말이다.”

 ◇“공은 공으로 갚을 것” 동지가 된 가족 

“언론인으로서 일제강점기를 타협하지 않고 온 가족과 함께 저항하며 살아왔다.”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전 위원장)

오기영 선생과 그의 일가를 향한 이 같은 평가의 이면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선생의 부인 김명복(金明福ㆍ1906~1943)이다. 형제가 생전 ‘동지’라 불렀던 김명복은 1928년 경성치과의학교(서울대 치과대학의 전신) 본과를 졸업한 치과의사였다. 1929년 21세의 오기영과 결혼한 김명복은 1931년 평양으로 잠입한 시아주버니 오기만에게 큰 도움을 줬다. ‘사슬이 풀린 뒤’에 따르면 평양치과에서 일하던 김명복은 오기만의 요청에 따라 현금을 수차례 전해줬다. 중국을 떠나면서 당시 돈 200원만 수중에 뒀던 오기만 지사가 “그새 내가 가져간 돈이 아마 3,000여원은 될 겁니다. 우리 혁명 전선의 신의를 위하여 공은 공으로 갚아 드릴 겁니다(사슬이 풀린 뒤 中)”라고 밝힌 걸 미뤄 짐작하면 그가 독립운동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오기만 지사가 상하이에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될 즈음, 오기영 선생 부부도 서울로 이사를 왔고 김명복은 1935년 서울 종로구 수송동(현재 안국동 사거리 인근)에 ‘김명복 치과’를 개원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시아주버니 오기만의 옥바라지와 병시중을 위해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김명복은 1943년 여섯째 아이 임신 중 겪은 임신중독증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일가의 이야기는 오기만 지사의 막냇동생 오기옥(吳基鈺ㆍ1919~?)이 이어갔다. 오기영 부부의 보살핌 아래 1938년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그는 해방에 즈음한 1944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 치안유지법은 1925년 일제가 반정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로 주로 독립운동가들이 이 법에 의해 투옥, 처형됐다. 오기옥은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지만 1950년 난중(亂中)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재야 문인 고 전우익 선생과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에 따르면 오기옥의 마지막 행적은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위원장이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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