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재 제작 어학당 측에 문제제기
美 학생들, 北 중립 발언에 발끈
지난해 8월 서울 성북구 한성대에서 열린 국제여름학교 보양식 체험행사에서 외국인 학생들이 삼계탕을 맛보고 있다. 기사 내용과는 관계 없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의 한 사립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 강사로 근무하는 김모(34)씨는 이달 초 문법 강의 중 중국인 학생 2명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어학당이 자체 제작한 교재에 중국 지도가 실렸는데, 중국인 학생들은 “지도에 대만과 홍콩 면적이 빠져있다”며 문제 제기를 하겠다고 발끈한 것이다. 김씨는 “다양한 국적 학생들이 모여 있어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 국제 이슈와는 무관한 크기나 면적 비교 표현을 배우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더 당황했다”면서 “국가 간 분쟁이 관련된 주제는 강사들이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의 다른 대학 어학당에서 2년째 일하고 있는 이모(34)씨도 최근 비슷한 일을 겪었다. 베트남 학생들이 크게 늘어 베트남 학생만 수강하는 맞춤 수업이 개설됐는데, 수업 자료로 쓰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려 받은 베트남 지도가 사달의 발단이었다. 베트남이 중국과 영해분쟁을 벌이는 태평양 일대 바다가 중국 명칭인 ‘남중국해’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동해’라고 표기하는 곳이다. 이씨는 “베트남 학생들이 한국말로 ‘남중국해가 아니다’ ‘자료를 받은 곳은 나쁜 사이트다’라고 벌컥 화를 내 진땀을 흘렸다”고 털어놨다.

외국인들이 한국어 교육을 받는 대학 부설 한국어학당에서 첨예한 국제분쟁이 재현돼 강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국어학당을 찾는 학생 수가 크게 늘어난데다, 국적도 다양해져 ‘교실 안 국제분쟁’은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19일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대학 부설 어학원 유학생 수는 2012년 2만681명에서 2017년 4만8,208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이 기간 전체 유학생 중 67.3%를 차지했던 중국인 비중은 30.8%로 줄어들었다. 그만큼 베트남과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유학생들의 비중이 높아졌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중국과 대만의 대립 관계는 '양안(兩岸)갈등'으로 불린다. 구글지도 캡처

한국어 강사들은 본국간 분쟁으로 갈등을 빚는 외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거나, 때로는 학생들에게 ‘사상검증’을 당하는 형편이라고 어려움을 호소한다. 특히 첨예한 이슈가 있는 국가의 학생들이 한 반에 모일 경우 서로 적대감을 갖거나 괴롭힘,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까지 생긴다고 한다. 상대적 다수인 중국 학생들이 소수인 대만 학생들을 따돌리는 일도 종종 벌어졌다는 게 강사들 얘기다. 12년차 한국어 강사인 박모(38)씨는 “각국 학생들에게 그 나라의 대표적인 수출품을 말해보라 했는데 일본 학생이 발언할 차례에 미국 학생이 끼어들어 ‘방사능이 대표 수출품’이라고 조롱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최대한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강사들의 태도가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박씨는 “동료 교사가 남북 통일 관련 토론 수업 중 미국 학생들로부터 ‘북한 정권의 독재나 북한 주민 인권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항의를 받았다”면서 “학생들로부터 일종의 사상검증을 받을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대학 부설 어학원연수생국적. 박구원 기자

강사들은 슬기로운 교실 안 국제분쟁 대처법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처지다. 최근 확인한 서울시내 대학 부설 어학당 4곳 중 강사들이 참고할 만한 가이드라인이나 매뉴얼이 있는 곳은 없었다. 지난해부터 어학당 한 곳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상대국 문화를 존중하는 교육을 별도로 실시하는 정도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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