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단지 법이 모두에게 평등했으면 하는 거야.”
이 대사와 함께 짧은 검은 머리의 한 남자가 자신을 추격하는 일당을 피해 아파트 복도를 질주한다. 무섭게 달려드는 거구의 남자들을 천장의 파이프와 벽을 이용해 물 흐르듯 요리조리 피한다. 이어 주저 없이 얇은 가스관 하나에 의지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유유히 사라진다. 이 남자의 이름은 레이토. 그는 오랜 기간의 독재로 무질서와 범죄가 판치는 황폐한 회색빛 도시를 내달리며 세상에 맞선다.
2004년 제작돼 2006년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13구역’의 한 장면이다. 파쿠르(parkour)의 창시자로 알려진 다비드 벨(46)은 이 영화에서 직접 주인공 레이토로 분해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을 선보였다. 15년 전 영화지만, 컴퓨터그래픽(CG) 없이 오로지 배우들이 맨몸으로 펼치는 액션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파쿠르가 알려지게 된 건 영화의 액션 때문이지만,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는 자기수양과 이타주의라는, 파쿠르의 정수가 담겨 있다.
벨은 1973년 프랑스 파리 근교에 위치한 노르망디의 페캉에서 태어났다. 벨이 유년기를 보냈던 1980년대는 프랑스에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던 시기로, 정부는 파리 주변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주거용 위성도시들을 대거 건설했다. 단위면적당 최대한 많은 인원이 거주할 수 있는, 거친 콘크리트의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흑인과 아시아인 등 다양한 종교와 인종을 가진 이민자들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했고 사회적 갈등과 충돌이 급증했다. 길거리엔 싸움이 멈추질 않았고, 공공기물 파손부터 방화 등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벨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고, 길거리에서 찾은 방법이 바로 파쿠르였다. 아직 파쿠르라는 이름도 없었고, 구체적인 기술이나 움직임도 없었지만 벨은 친구 8명과 함께 성룡의 액션 영화, 마블과 DC코믹스의 히어로들을 떠올리며 도심의 건물들을 뛰어다니고 기술을 연마했다.
이들은 1997년 ‘야마카시(yamakasi)’라는 팀을 결성해 활동 범위를 넓혔고 영화 ‘레옹’으로 유명한 뤽 베송 감독의 눈에 띄어 2001년 영화 ‘야마카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흔히 파쿠르와 혼동되는 야마카시란 단어는 여기서 온 말이다.
이때 전설적인 소방관이자 군인이었던 아버지 레이몬드 벨의 영향이 미쳤다. 베트남계 프랑스인 레이몬드는 군인 시절 익히고 발전시킨 수련체계를 아들에게 전수하며 “파쿠르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탈출하는 실용적인 이동기술”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쿠르가 개인의 생존이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로 연결되는 언어로 확장된 계기였다.
벨은 아버지의 유산과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더욱 드러내고,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야마카시에서 탈퇴했다. 벨은 2004년 영화 ‘13구역’에서 자신을 닮은 레이토 역을 맡아 파쿠르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후 13구역 시리즈와 다수 영화와 드라마에서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투혼의 액션 연기를 이어오고 있다.
다비드 벨은 2014년 ‘13구역’의 할리우드 리메이크판인 ‘브릭맨션’의 개봉을 앞두고 미국 연예전문매체 위갓디스커버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파쿠르는 내가 평생 추구해야 할 것이며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파쿠르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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