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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미수 전과자가 심리상담 센터 열어도 못 막아… 허술한 자격 제도부터 손봐야

입력
2019.05.24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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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실의 악마, 그루밍 성폭력] <하> 제도 개선 등 해법은 없나

[저작권 한국일보] 최근 10년간 심리상담 관련 민간 자격증 등록 건수_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최근 10년간 심리상담 관련 민간 자격증 등록 건수_신동준 기자

심리상담이 ‘그루밍(Grooming) 성폭력’으로 악용되는 현실을 개탄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상담 전문가들이다. 심리상담은 개개인의 내밀한 감정과 경험을 다루는 일이기에 윤리성이 생명이다. 상담실 내 성범죄는, 범람하는 자격증과 상담센터 속에서 심리상담의 윤리성이 무너졌다는 신호다.

23일 김인규 한국상담학회장(전주대 교수)과 권수영 한국상담진흥협회장(연세대 교수)은 “부실한 자격 관리 체계를 제대로 손보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심리상담 분야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한국상담학회장 김인규(오른쪽) 전주대 교수와 학회 고정미 사무국장이 상담실 내 성범죄 근절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지난 17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한국상담학회장 김인규(오른쪽) 전주대 교수와 학회 고정미 사무국장이 상담실 내 성범죄 근절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홍윤기 인턴기자

 ◇자격증 박탈? 또 다른 자격증 따면 그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심리상담은 지속적으로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미래 유망 직업 중 하나로 꼽혔다. 이 때문에 심리상담 자격증은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 2008년만 해도 한해 새로 만들어졌다고 등록된 심리상담 자격증만 20건이었다. 이게 2015년엔 880여건으로 치솟았다. 한해 새로 만들어진 심리상담 자격증만 수백개다 보니 지난해 9월 기준 민간 자격증 3만6,329개 가운데 심리상담 관련 자격증만 4,446개로 12% 정도를 차지한다. 민간자격증 10개 중 1개는 심리상담 관련 자격증이라는 얘기다.

이러니 관리가 안 된다. 아니 관리를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다. “성범죄 같은 문제가 문제가 생겼을 경우 학회 차원에서 윤리위원회를 소집해 진상조사를 거친 뒤 징계를 내립니다. 그런데 ‘자격 및 회원 박탈’이란 중징계를 내려도 효과가 없어요. 다른 학회나 기관을 찾아가 새 자격증을 받으면 되니까요.” 김 학회장의 푸념이다.

실제 한국상담학회는 ‘상담 종결 이후에도 2년 내 내담자와 성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자체 윤리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유명무실이다. 다른 곳에서 자격증을 받으면 된다. 아니, 애초 심리상담을 하기 위해 심리상담계 양대 학회로 공신력 있다고 평가받는 한국상담학회나 한국상담심리학회가 주는 자격증을 굳이 애써 딸 필요가 없다. ‘인터넷 교육 10시간 수료’만 하면 하루 만에 자격증 주는 곳이 넘친다. 학회 자격증이나 다른 자격증이 둘 다 ‘민간 자격증’이긴 매한가지다. 여성 내담자에게 옷을 벗고 성기를 그리게 한 A(56)씨(본보 5월 22일자 1면 보도)도 양대 학회 자격증 소지자가 아니었다.

아예 새 자격증을 만들 수도 있다. 민간 자격증은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다. 간략한 서류만 챙겨 넣으면 별도 검증 과정 없이 새 자격증을 만들 수 있다. 김 학회장은 “새 자격증을 만들어 등록해두고 몇 년째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경우도 있다”며 “운영실적이 없으면 자격증을 없애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규제조차 없다”고 말했다. 심리상담 자격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저작권 한국일보]민간자격증 중 심리상담사 자격증이 차지하는 비율_신동준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민간자격증 중 심리상담사 자격증이 차지하는 비율_신동준 기자

 ◇“심리상담, 국가가 관리해야” 

심리상담을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현재 심리상담과 관련해 국가자격증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은 보건복지부의 ‘임상심리사’, 여성가족부의 ‘청소년상담사’, 교육부의 ‘전문상담교사’ 정도다. 심리상담과 관련한 나머지 자격증들은 모두 민간 자격증이다. 김 학회장은 “사람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심리상담도 의사나 간호사처럼 국가가 면허를 발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장 좋은 해법이긴 하지만 이 주장은 몇 년째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등 관련성 있는 부처 그 어느 곳에서도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수천개의 관련 자격증이 난무하고 있는 현실에서 뒤늦게 국가가 들어가 손을 대긴 곤란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권 협회장은 단계적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미 국가자격증으로 관리되고 있는 ‘청소년상담사’를 ‘청소년ㆍ가족 상담사’로 확대하는 것이다. 청소년에다 가족까지 더하면 거의 전 연령의 국민들을 다 상담할 수 있게 된다. 권 협회장은 여가부에 이 제안을 내놓은 상태다.

이것도 시간이 걸린다면 일단 기존 심리상담 자격증 기준부터 강화할 필요도 있다. 미국ㆍ일본 등은 민간 자격증이라 해도 운영기관, 관리자의 전문성을 검증한다. 김 학회장은 “심리상담 자격을 당장 면허화할 수 없다면 전문성 없는 민간 자격증이 늘어나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검증’ 단계만 넣어도 상황은 한결 나아질 것이란 얘기다.

심리상담센터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은 상담 관련 자격증이 없어도 누구나 심리상담센터를 열 수 있다. 심지어 전과자도 가능하다. 지난 2017년 여성 내담자들을 상습 성추행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강모(49)씨는 2012년 강간미수죄로 징역을 살았던 전력이 있었지만, 이후 심리상담센터를 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고정미 한국상담학회 사무국장은 “현재 아동 청소년들을 상담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범죄 경력 조회를 하고 있는데 일반 심리상담센터를 열 때도 최소한 운영자가 관련 범죄 전력이 있는지,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정신적 문제가 있는 피성년 후견인이 아닌지 정도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한국상담진흥협회장을 맡고 있는 권수영 연세대 교수가 심리상담사를 국가 자격증화 하는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한국상담진흥협회장을 맡고 있는 권수영 연세대 교수가 심리상담사를 국가 자격증화 하는 방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인기 기자

 ◇ ‘전문상담진흥법’을 만들자 

이런 모든 논란의 뿌리에는 심리상담 자체가 모호하다는 이유가 깔려 있다. 정신과 의사가 진행하는 전문적인 진료에서부터 가까운 친구에게 깊은 고민을 털어놓는 것까지, 이 모두가 심리상담에 포함된다. 점을 치거나 타로를 보거나 종교인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심리상담이다. 심지어는 ‘전생치료’ 같은 것도 있다.

그래서 김 학회장과 권 협회장은 ‘전문상담진흥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을 만들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일상적 상담을 넘어선 전문적 심리상담인가를 정의해줘야, 위반행위를 구분해 심리상담의 윤리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경우 각각의 주정부마다 심리상담 전문 부서가 있고 이 부서가 심리상담사들을 관리 감독한다.

윤리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우리는 윤리 교육이라면 아직도 몇 차례 강의 듣는 것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미국은 심리상담 교육 과정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이런 부분은 상담윤리에 저촉되지 않는가”를 반복적으로 묻는다. 김 학회장은 “상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딜레마 상황을 제시하고 서로 토론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윤리 교육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심리상담이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울 경우 언제든 심리상담을 중단시킬 권리가 있음을 내담자에게 알리는 걸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 심리상담은 다름 아닌 내담자를 위한 것인 만큼 내담자에게 상담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해당하지만 심리상담사들이 자주 놓치는 부분 중 하나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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