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운영은 늘 어려웠어요. 그래도 보람찼던 건 후배들을 후원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공간을 내주고 제작비를 지원해 주면 후배들은 진심을 담은 작품을 보여줬지요.”
배우 윤석화씨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그가 17년간 운영해 온 서울 대학로의 ‘설치극장 정미소’는 만성 경영난을 버티지 못하고 다음 달 폐관한다. ‘정미소’는 윤씨와 건축가 장운규씨가 2002년 낡은 목욕탕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다. ‘쌀을 찧어내듯 예술의 향기를 피워내자’는 뜻을 담아 정미소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후 다양한 예술 실험을 펼쳐내는 공간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켜 왔지만, 윤씨의 1인극인 ‘딸에게 보내는 편지’(6월 11~22일)를 끝으로 문을 닫게 됐다. 건물은 매각된다.
정통 연극의 산실이자 연극 실험의 첨단이었던 서울의 소극장들이 잇따라 사라지고 있다. 건물 재테크 유행에 따른 임차료 상승이 경영을 위협한 지 오래다. 낙후한 시설로는 관객을 끌어 모을 수 없지만, 제대로 보수할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란한 영상 콘텐츠에 밀려 연극이 외면받는 것도 한 이유다. 소극장의 자립은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됐다.
◇대학로는 10년 넘게 하향곡선
설치극장 정미소만 슬픈 운명을 맞은 건 아니다. 국내 최초 민간 소극장인 서울 명동의 ‘삼일로창고극장’이 2015년 문을 닫았고, 1970~1980년대 연극의 메카였던 정동 세실극장은 2018년 폐관 소식을 알렸다. 29일 예술경영지원센터의 공연예술실태조사에 따르면, 대학로 지역의 300석 미만 규모 소극장은 2013년 151개에서 지난해 133개로 줄었다.
대학 부속 극장과 공공극장을 제외하면 대학로 소극장의 절반 정도를 민간에서 운영한다. 소극장 대표가 건물까지 소유한 경우는 1% 미만이다. 대부분 소극장이 건물을 임차해 쓴다. 150석 미만 규모의 소극장 임차료는 한 달에 250만~500만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소극장은 극단에 극장을 빌려 주고 대관료를 받아 수익을 내며, 월 대관료는 500만~800만원 정도다. 소극장이 대관료와 임차료의 차액인 약 300만원으로 시설 운영비와 인건비 등을 충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한 달 내내 대관이 이뤄졌을 때의 얘기다. 최윤우 한국소극장협회 사무국장은 “공실 없이 소극장이 운영되려면 대학로에서 연간 2,500편 정도의 공연이 필요하다”며 “하지만 실제 무대에 오르는 건 1,200편 정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소극장 상생 방안을 찾아라
삼일로창고극장과 세실극장은 서울시가 건물 소유주와 장기 임대계약을 체결하면서 지난해 다시 연극계로 돌아왔다. 서울문화재단이 삼일로창고극장을, 서울연극협회가 세실극장을 위탁 운영한다. 서울시는 2016년부터 ‘서울형 창작극장’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300석 미만 소극장 가운데 10~20곳에 임차료 11개월분을 전액 지원한다.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극장은 극단 대관료를 50% 이상 할인해 주고, 대관이 없는 동안엔 자체 공연이나 축제를 기획해 공실률을 낮춘다는 것이 사업의 골자다.
그러나 공공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 근원적 해법은 아니다. 돈보다 중요한 건 극장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다. 극장과 극단이 살고, 관객이 늘고, 궁극적으로 연극계가 부흥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연극계의 한 관계자는 “임차료 지원으로 극장 운영에 당장 숨통이 트이기는 하지만, 결국 건물주에게 돈이 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고 전했다.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삼일로창고극장이 ‘관의 입김’을 제한하려 하는 것도 소극장의 개성과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삼일로창고극장의 예산 책정과 프로그램 기획 등을 연출가, 극작가 등 민간 운영위원들이 전적으로 결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공공극장에서는 시도할 수 없는 작품과 소극장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제작하기 어려운 작품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문화 이슈가 그렇듯, 소극장을 경제 논리로 재단할 순 없다. ‘예술가들이 기획한 예술 활동을 실험하고 탐구하며 관객과 만나는 소중한 장소’라는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절감한 젊은 극작가와 연출가들이 대학로 바깥의 소극장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서울 서촌의 ‘서촌공간 서로’와 신촌의 한 건물 옥상에 들어선 ‘신촌극장’,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는 ‘신촌문화발전소’, ‘미아리고개예술극장’ 등이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공간으로 주목 받고 있다. ‘서촌공간 서로’는 낭독공연을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로 내세웠고, ‘신촌극장’은 연극뿐 아니라 무용, 미술, 음악 등 여러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 실험을 하는 곳이 됐다. 최윤우 사무국장은 “극장의 역사성에만 기댈 게 아니라, 소극장 자체의 브랜드 가치를 고민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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