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밀려나는 주류 세력
이탈리아의 최장기 무정부 사태(지난해 3~6월ㆍ88일), 영국의 사상 최대 표차(230표ㆍ올해 1월 29일) ‘브렉시트’ 안건 부결, 그리고 미국의 최장기 연방정부 폐쇄(35일ㆍ지난해 12월~올해 1월).
2차 대전 이후 70여년간 세계 평화와 풍요를 이끌었던 서구 민주주의가 위기에 몰렸다. 빈부격차 확대와 저개발국의 불법 이민자 유입 등 사회 현안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분열과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총선을 치르고도 집권 가능 다수 정치 세력이 규합되지 않아 분열적 무정부 사태가 3개월 가까이 이어졌고, 민주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영국과 미국에서도 타협 대신 유례없는 극단적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극우정당 ‘동맹’과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이 연합해 서유럽 최초로 포퓰리즘 정권이 등장했고 영국에서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합의안이 1년 넘게 마련되지 못하는 등 전통적 대의 민주주의의 실패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정통 민주주의가 잃은 자리는 ‘반대와 분열’의 정치가 차지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극우ㆍ극좌ㆍ반체제ㆍ포퓰리즘 등을 내세운 정치 세력이 대안 없이 유권자를 선동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중도ㆍ온건 성향의 기존 주류정치 세력이 사회 현안 해결에 무능함을 드러내자, 그 실패를 공격 빌미로 활용하는 극단주의적 성향의 신흥 정치 세력이 급부상하는 모습이다.
가장 큰 홍역을 치르는 곳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됐다고 자부했던 서방국가들이다. 지난달 유럽의회 선거에서 주류세력이던 중도좌파ㆍ중도우파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과반 의석(총 751석 중 376석) 확보에 실패했다. 자유주의와 녹색당, 극우 성향 정치 세력이 약진했다. 기성의 몰락이자, 대안의 부상이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권자 분열이 더욱 양극화했다”면서 “향후 유럽의회가 이 간극을 메울 정책을 펴 나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에서도 온건 정치 세력이 사라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이민ㆍ국수주의적 우경화 메시지로 정권을 잡자, 상극의 정치이념인 ‘사회주의’가 반대 진영에서 힘을 얻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좌클릭’도 뚜렷하다. 지난달 미국 성인남녀 1,024명을 상대로 실시한 갤럽 조사에서 10명 중 4명이 “일정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미국에 좋다”고 답했다.
영국도 브렉시트 강경파인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이 테리사 메이 총리 후임으로 급부상했다. 유럽의회 선거에선 극우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브렉시트당이 창당 2개월 만에 31.69%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패라지와 보리스는 내 친구”라며 이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대서양을 뛰어넘는 ‘국수주의 연대’인 셈이다.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중남미 상황은 더 위태롭다. 브라질에서는 막말과 극우 성향 탓에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당선됐다. 89년간 우파가 정권을 장악해 온 멕시코에서는 좌파가 집권했다. 이코노미스트는 ‘포퓰리즘과 정치적 양극화가 라틴 아메리카를 위협하고 있다’는 기사에서 “유권자들이 ‘힘의 절제’를 약속하지 않는 포퓰리스트들에게 눈을 돌리면서 중도파 정당은 약해지거나 붕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론 국가마다 분열의 배경과 맥락은 서로 다르다. 미국은 인종ㆍ이민자 문제, 유럽은 2010년대 이후 불거진 난민ㆍ실업률 문제 등이 핵심 이슈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이를 관통하는 큰 흐름이 있다. △경제난과 소득 불평등, 불법 이민 등에 따른 사회ㆍ경제적 혼란 △기득권 주류 정치 세력의 무능과 부패 △포퓰리즘ㆍ극단적 정치 세력의 대안 없는 선동과 부상 등이다.
결국에는 어느 한쪽에서 뺏어 다른 한쪽을 이롭게 하는 약탈적 방법 대신,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절충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데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도록 정치가 노력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박홍민 미국 위스콘신대 교수(정치학)는 “경기가 좋을 때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힘든 시기가 오면 ‘남 탓’을 하게 되는” 심리가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흑인이든 히스패닉이든 특정 집단을 문제의 원인으로 돌리고, 기득권ㆍ상대 정당을 적으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양극화와 분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유럽 내 양극화 현상에 대해 “(유권자들이 갖고 있는) 기성 정치나 대의제에 대한 불만은 이해하고 공감한다”면서도 “다만 극우든 극좌든 새로운 정치가 증오를 부르고, 사회를 단순화해서 설명하고, 자신들이 집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 미국ㆍ유럽 등 서구 선진국부터 남미까지 극단적인 정치 양극화로 인해 대화와 타협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가 앓고 있습니다. 3회 연재로 전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과 대안을 모색합니다.
- 글 싣는 순서 <상> 밀려나는 주류세력 <중> 위태로운 극단세력 <하> 중도가 살아남는 법 하> 중> 상>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홍윤지 인턴기자ㆍ권현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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