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건축계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62)는 ‘종이 건축가’이다. 얇고 약한 종이로 성당이나 박람회장 등 대규모 건축물부터 1평(3.3㎡)짜리 임시 대피소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종이 건축을 선보여왔다. 대형 종이 돔을 선보인 독일 하노버 엑스포 일본관(2000년), 일본 야마나시현의 ‘종이의 집’(1995년), 가나자와시의 ‘시인의 서고’(1991년) 등이 대표적이지만 그의 종이 건축은 전 세계 재난현장에서 더 빛을 발한다. 지금도 지난해 5.7규모의 지진이 발생한 일본 북동부 홋카이도, 케냐 북부 난민캠프 칼로예베이 등에서 종이로 임시 대피소를 만드는 중이다. 이 같은 그의 종이 건축의 철학을 담은 책 ‘행동하는 종이 건축’이 최근 국내에 출간됐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그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반 시게루의 종이 건축은 종이 튜브(지관)를 기둥이나 프레임 등의 구조재로 사용한다. 두루마리 휴지심처럼 철심에 접착제를 바른 종이테이프를 나선 모양으로 감아서 원형 기둥으로 만든다. 방수도 안되고 화재에 취약하고, 강도도 약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대해 반은 “종이는 진화한 나무”라며 “건축자재로 사용하는 나무처럼 종이도 쉽게 방수할 수 있고, 벽지처럼 방화에도 강한 첨단 소재”라고 반박한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는 “기존 건축 재료를 더 튼튼한 재료로 개발하는 것보다 강도가 약한 재료를 그대로 사용해 더 튼튼한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응수했다. 종이는 다른 재료에 비해 강도가 약하지만 과학적인 구조 설계로 이를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1987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 후 종이 건축을 처음 선보였다.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1898~1976)의 전시회장 건축을 맡게 된 그는 자연소재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나무를 쓰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반은 “예산도 없었지만 전시회가 끝난 뒤 나무를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까웠다”며 “우연히 지관에 걸린 천 스크린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지관은 저비용으로 원하는 길이, 두께, 지름에 맞춰 만들 수 있었고, 가벼워서 조립하기도 편하고 재활용까지 가능했다. 반은 “종이 건축이 친환경이라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친환경 같은 개념이 없었다”며 “멀쩡한 지관을 버리는 게 아까웠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물건을 낭비하는 일이 ‘아깝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친환경’의 기본이 아닐까”라고 반문했다.
그의 종이 건축이 힘을 발휘한 곳은 재난현장이었다.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당시 난민들이 달랑 비닐 한 장을 깔고 있는 사진을 보고 팔을 걷어붙였다. 반은 “유엔의 난민캠프는 비닐로 된 깔개만 제공해줬고, 난민들이 산에서 나무를 마구 잘라 집을 지으면서 삼림파괴도 심각한 문제가 됐다”며 “캠프 주위에 있는 종이박스와 천 조각 등을 활용해 임시 대피소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후 이듬해 일본 고베 대지진에서부터 터키(1999년), 스리랑카(2004년), 중국 쓰촨성(2008년), 이탈리아 라퀼라(2009년), 아이티(2010년), 일본 도호쿠(2011년), 필리핀 세부(2013년), 뉴질랜드(2011년), 일본 구마모토(2016년) 등에서 발생한 지진과 태풍 등 재난현장에서도 지관을 활용한 임시 대피소와 종교시설, 지역 주민센터가 만들어졌다.
‘재난시설 건축가’라 불리는 그는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반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건축가들은 돈과 힘을 과시하려는 부자와 정부, 개발업자를 위해 기념적인 건물을 짓는데 집중하고 있다”며 “건축가들이 사회를 위해 일하지 않는 데 대해 실망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자연’ 재해는 없다고 역설했다. “재해는 사람이 자초한 ‘인공’ 재해입니다. 지진으로 사람들이 죽지 않고, 지진으로 인한 건물이 무너져 사람들이 다치고 생명을 잃습니다. 그건 (건축물을 만드는) 건축가의 책임입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많은 이들에게 건축가들이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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