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 자의적 조서ㆍ불명확한 공소장ㆍ구속 남발 등 피고인 방어권 침해”
양승태 등 뒤늦은 ‘변신’에 빈축 불구 ‘사법개혁’ 목소리에 힘 실려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 이후 줄줄이 법정에 선 전ㆍ현직 법관들이 저마다 “피고인이 되고서야 잘못된 관행에 눈을 떴다”며 각종 사법절차를 문제삼고 있다. 사법부 수장, 사법 행정 책임자로 있을 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던 관행을 궁박한 처지가 된 뒤에야 문제삼는 행태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지만 사법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았던 피고인들의 지적인 만큼 법원이나 검찰이 귀담아 들을 대목이 없지 않다. 사법농단 피고인들의 뒤늦은 깨달음이 아이러니하게도 피고인 방어권 보장과 공판중심주의에 소홀했던 법조계를 향한 죽비가 된 셈이다.
①검찰 조서를 못 믿겠다
사법농단에 연루돼 재판을 받는 전현직 법관들이 하나같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검찰 수사관행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달 29일 첫 공판에서 “검찰의 신문을 받아보니 교묘한 질문을 통해 답변과 전혀 다른 내용으로 조서에 기재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면서 “법관들이 조사를 받은 이후 검찰 조서가 얼마나 경계해야 할, 신빙성 낮은 것인가를 직접 체감한 점이 사법농단 수사의 긍정적 측면”이라고 비꼬았다.
사법부 수장을 지낸 법률 전문가가 뒤늦게 이런 주장을 펼친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지만 피의자 신문조서를 둘러싼 검찰 수사 관행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가 법정에서 그대로 증거로 인정되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를 저해한다는 지적은 계속 있어 왔다. 한 원로 법학자는 “검찰 조서와 신문 녹취를 비교해보면 검찰 측에 강압적인 측면이 적지 않다”며 “자백에 의존하는 야만적인 제도”라고 했다.
② 구속으로 피고인 방어권 침해말라
구속 재판을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5일 제출한 재판부 기피사유서에 “재판장이 불구속 재판의 원칙을 무시한 채 구속상태에서 예단에 맞춰 유죄를 선고하려 한다”면서 “이른바 트럭 기소(수사기록을 트럭에 운반할 정도로 많이 제출함)라는 신조어를 만들더니 기록 복사도 덜 된 구속 피고인에게 주4일 공판을 강행하려 했다”고 성토했다.
임 전 차장의 주장이 아니라도 불구속 재판은 법정의 큰 원칙 가운데 하나다. 임 전 차장의 주장 이후로 구속 피고인들이 잇달아 재판 도중 보석으로 풀려나는 사례가 이어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 김경수 전 경남지사, 정재찬 전 공정위원장 등이 보석을 받고 구속을 면했다.
③ 검찰은 수사 여론전을 자제하라
검찰 수사단계 피의자 인권 문제도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의 지적으로 일부 개선이 이뤄진 문제 중 하나다. 임 전 차장 등은 법정에서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와 언론 보도로 진실은 간데 없고 이미 괴물 같은 중범죄자가 됐다”고 주장했고, 현직 법관들도 검찰 공보관행에 잇달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과거 여론의 지적에 꿈쩍하지 않던 법무부는 포토라인을 사실상 폐지하고 피의사실 공표를 엄격히 제한하는 방안을 준비 중이다.
④ 공소장을 간결ㆍ정확하게 쓰라
검찰의 공소장 작성 방식도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이 거세게 문제 삼는 것 중 하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첫 공판에서 공소장이 불명확해 어떤 점을 방어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며 “권투에서 상대방의 눈을 가리고 두세 사람이 때리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법관 때 전혀 다른 얘기를 했던 양 전 대법원장의 ‘변신’은 빈축을 사기도 한다. 그는 대법관 시절 “법원이 공소장 일본주의(재판부가 선입견을 갖기 않도록 공소장 외 서류나 증거물을 첨부해선 안 된 다는 원칙)를 경직되게 이해하면 오히려 사법절차를 비효율적으로 만들어 정의 실현에 장애가 초래될 것”이라고 판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지적한 ‘공소장 일본주의’ 원칙은 검찰이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성창호 부장판사 사건을 받은 재판부가 “공소장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검찰에 지적하는 등 사법농단 재판에서 공소장 일본주의 원칙이 쟁점이 되면서 검찰의 관행에 제동이 걸리는 양상이다.
사법농단은 사법부가 국민에게 주어진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아 생긴 업보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평가다. 한 때 사법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던 피고인들의 뒤늦은 지적과 각성이지만 사법개혁을 위해서는 법원이나 검찰이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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