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인들이 보는 유람선 참사]
개방 이후 관광산업 빠르게 발전… 참사 후에도 호객꾼들 활동 여전
대형 크루즈 수 제한 등 주장에도 경제적 이익 위해 안전을 위험에
“개방 때는 관광산업 발전으로 서비스의 질도 올라 갈거라 생각했는데 우린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헝가리 유람선 참사 현장인 부다페스트 머르기트 다리 위에서 최근 만난 마치카 실비아(52)씨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1985년 헝가리 국영해운회사 ‘마하트’에 입사해 구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근무했다는 마치카씨. 다뉴브강을 따라 오스트리아 빈과 부다페스트를 오가는 쾌속선 승무원이었다는 그는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야경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변한 것이라면 부다페스트를 지나는 선박의 수”라고 말을 잇던 그는 “정박할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배들을 보며 언젠간 사고가 날 거란 불안감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그가 가리킨 다뷰느강에는 오토바이(소형 유람선)와 대형 트럭(크루즈)들이 차선도 없는 도로에서 위험천만하게 속도를 높이는 것 같이 질주하고 있었다.
헝가리 유람선 참사를 취재하면서 만난 숱한 헝가리 국민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마치카씨가 말한 것처럼 허블레아니호의 참사는 예고된 인재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연방이 무너진 1990년대 이후 관광산업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여행객도 급격히 늘었지만 서비스의 질과 안전성은 도리어 낙후했다는 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벗어난 헝가리가 급격한 경제발전을 도모하면서 안전이라는 가치가 희생됐다는 불만의 목소리인 셈이다.
마치카씨에 따르더라도 헝가리 관광 산업은 괄목상대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는 “사회주의국가 국영기업의 경영방식으로는 헝가리를 찾는 관광객이 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면서 “관광산업이 성장하려면 국영 해운회사 1개로는 부족하다는 요지의 대학 졸업 논문까지 썼다”고 회고했다. 당시 마치카씨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1990년 다뉴브강을 운행하던 여객선은 25대가 전부였지만 마치카씨와 인터뷰하던 당일 머르기트섬부터 체펠섬까지 다뉴브강 부다페스트 유역에 떠 있던 선박만 78대였다.
하지만 다뷰브강에 선박이 넘쳐나는 만큼 관광의 안전성도 늘어나지는 않았다는 평이다. 마치카씨는 “1991년 이후 대형 크루즈선을 포함해 선박은 몇 배 이상 증가했지만 안전을 포함한 서비스의 질이 발전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유람선 참사 이후에도 다뉴브강의 사정은 달라진 게 없었다. 다뉴브강 엘리자벳 다리 인근 선착장에서는 여전히 호객꾼들이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며 관광객을 모은다. 누구도 탑승객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고 승선 명부도 없다. 아예 구명정과 구명조끼가 비치되지 않은 배들도 있다. 한 선사 직원 레카 야캅(32)씨는 “사고에 대해 정말 유감”이라면서도 “100년에 한 번 일어날 사고였으니 앞으로 100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이러다 보니 부다페스트에서는 관광산업의 변화를 성찰하고 보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부다페스트 코비누스 대학 부설 세계경제연구소의 블레네시 에바 박사는 “헝가리 언론은 모든 잘못이 우크라이나인 선장에게 있는 듯 참사를 다뤘다”고 꼬집었다.
블레네시 박사에 따르면 현지 전문가들은 부다페스트 시내에 정박하는 바이킹 시긴 같은 대형 크루즈 수를 제한하고 일몰 이후엔 운항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계속 주장해왔지만 변화는 없었고 결국 허블레아니호 참사가 발생했다. 그는 “가해 선박의 부주의한 운항과 제약 없이 늘어난 교통량, 저가 관광 확대로 인한 허술한 안전 관리 등이 서로 영향을 미친 예견된 비극”이라며 “대형 크루즈가 제한 없이 다닐 수 있게 한 정부당국도 경제적 이익을 위해 관광객의 안전을 위험에 빠뜨린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부다페스트=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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