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 가보니]
시민들 입은 검은 티셔츠엔 ‘자유 잃다(自由閪)’ 새겨… 성기 의미 비속어로 정부 조롱
“법안 철회, 람 장관 사퇴까지 시위가 열리면 끝까지 동참”… 람은 두 번째 사과 기자회견
홍콩 도심 애드미럴티 입법회 건물과 맞닿은 보도블록 바닥 위에서 1,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앉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정부의 송환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이곳에서 교복을 입고 집회에 참여한 여중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시민들이 입은 검은 티셔츠에는 '자유'와 함께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비속어가 선명했다. 정부를 조롱하는 항의의 표시다. 김광수 특파원

“어리다고요? 우리가 가만있으면 대체 누가 나서나요.”

범죄인 송환 법안에 반대하는 200만 시위대가 홍콩 도심을 휩쓸고 간 다음날인 17일 입법회(우리의 국회) 바로 옆 집회 현장을 찾았다. 길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1,000여명의 시민 사이에서 앳된 얼굴의 여학생을 만났다. 자신을 15살, 중학교 3학년이라고 소개한 소녀는 “인터넷에서 시위가 커지는 것을 보고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며 “요즘 시험기간이라 수업이 일찍 끝나서 매일 나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름을 물었더니 눈치를 보며 머뭇댔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며 휴대폰을 꺼내자 “교장 선생님이 아시면 큰일 난다”며 황급히 손으로 왼쪽 어깨 근처를 가렸다. 학교 마크였다. 정부 반대 구호가 적힌 검은색 티셔츠를 걸쳤지만 그 속에 입은 하얀색 교복이 선명했다. ‘시위에 참여하기엔 너무 어린 것 아니냐’고 걱정스럽게 묻자 옆에 있던 친구가 나서더니 “부모님이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면서 “우리 말고도 중학생만 110명쯤 여기에 와 있다”고 당차게 말했다.

홍콩 시민들이 입은 검은 티셔츠엔 저마다 흰 글씨로 ‘자유 잃다(自由閪)’고 새겨져 있었다. 동시에 자유라는 말 뒤에 광둥어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비속어를 붙여 정부를 조롱하는 항의 표시다. 길가에는 ‘살인자 캐리 람 퇴진’,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총알에는 투쟁으로 맞서자’ 등 온갖 구호가 난무했다.

홍콩 도심 애드미럴티 전경. 16일에는 200만 시위대가 도로를 가득 메웠지만 17일에는 경찰이 통제를 풀면서 차량이 쌩쌩 달리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홍콩 정부는 17일 차량 통제를 모두 풀었다. 지난 9일 100만 시위 이후 불과 일주일 만이다. 2014년 행정수반 직선제 반대 시위 당시 시민 50만명을 통제하기 위해 경찰이 79일간 거리를 막아선 것과 대조적이다.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의 집무실 건물 앞에도 고작 3대의 카메라만 자리를 잡고 있어 긴장감은커녕 휑한 느낌이었다.

함성은 그쳤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시내 곳곳에 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정부에 저항하고 있다. 시위가 가장 격했던 입법회 인근에서 보도블록 위에 생수와 우산, 간식 등을 잔뜩 쌓아놓은 채 진을 치고 있는 예닐곱 명의 남성들을 만났다. 시민들이 기증한 물품을 시위 참가자들에게 전해주는 자원봉사자였다.

리(李ㆍ27) 씨는 “어제(16일) 200만명이 모였지만 경찰이 진압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지 않았느냐”며 “우리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주장을 외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호프집에서 일하는 그는 “사장님이 오히려 적극 지지해줘 2주째 휴가를 내고 시위 현장을 지키고 있다”면서 “법안을 완전히 철회할 때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7일 홍콩 도심 거리에서 만난 노(44)씨의 팔뚝 문신에 '초심을 잃지 말자'라고 적혀있다. 그는 5년전 우산 혁명 당시 정부 반대 시위에 참여하면서 이 문신을 새겼다. 김광수 특파원

5년 전 우산 혁명을 이끌다 복역한 뒤 17일 석방된 조슈아 웡(黃之鋒ㆍ22)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잠자코 기자를 지켜보던 노(盧ㆍ44)씨는 “그처럼 젊은 사람들이 나선 덕분에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 시선을 끌었다. ‘초심을 잃지 말자’라고 적혀 있었다. 물었더니 “5년 전 시위 때 새긴 것”이라며 “정부가 시민들의 뜻을 거스르면 언제든 행동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저만치에서 제복을 입은 10여명의 경찰이 열을 맞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은 말을 끊더니 부랴부랴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짐짓 딴청을 피웠다. 경찰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기자를 바라봤다. 평화적인 시위라고는 해도 공권력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7일 홍콩 도심 입법회 부근에서 시위 참여 시민들에게 물품을 지원하는 자원봉사자들을 만났다. 기자와 한참 이야기하던 노(44ㆍ왼쪽) 씨와 리(27)씨가 저만치에서 지나가는 경찰들을 보더니 갑자기 딴청을 피우면서 시선을 돌리고 있다. 김광수 특파원

지난 15일 고공 시위 도중 30대 남성이 빌딩에서 추락해 숨졌다. 그를 추모하는 조화와 현수막, 시민들의 메모가 벽 한 켠을 가득 메웠다. 이곳을 지나던 20대 후반의 연인은 “시위는 참 감동적이었지만, 법안을 철회하고 람 장관이 사퇴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면서 “어제도 시위에 참여했고, 이번 주말에 또 열리면 다시 동참하러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5일 송환법 반대 고공 시위 도중 빌딩에서 추락해 숨진 30대 남성을 추모하는 홍콩 시민들의 메모가 도심 입법회 인근 벽 한 켠을 빼곡히 메웠다. 김광수 특파원

시위를 주도하는 야권과 시민단체는 18일 4가지 원칙과 요구사항을 확정했다. 20일까지 법안을 완전 철회하고,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한 언론을 규탄하고, 붙잡힌 시민들은 당장 풀어주고, 폭력을 사용한 경찰은 엄중 처벌하는 내용이다. 홍콩 정부가 법안 개정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자칫 시위의 동력이 떨어져 흐지부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람 장관은 16일에 이어 18일 두 번째 사과 기자회견을 했지만 법안을 재추진 않겠다고 거듭 약속했을 뿐 시민들이 원하는 법안 철회나 본인의 사퇴는 거부했다. 이처럼 김을 빼 대열을 흩뜨리려는 정부와 고삐를 바짝 당겨 끝장을 내려는 시민들이 맞붙으면서, 가뜩이나 후텁지근한 홍콩의 한여름은 한층 강렬하게 달아오르고 있다.

홍콩 도심 애드미럴티의 입법회와 정부청사를 두른 철담 곳곳에 정부 반대 구호가 적힌 푯말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하지만 근처를 지키는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김광수 특파원

홍콩=김광수 특파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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