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축소판’ 같은 다양성이 있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도시 런던의 이야기를 <한국일보>가 3주에 한 번씩 토요일에 연재합니다. 런던에서 유학 중인 김혜경 국경없는기자회 한국특파원이 그려내는 생생한 런던 스토리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난 14일 오후 7시. 수 천명의 인파가 침묵한 채 런던 노스켄싱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스카프나 머리핀 등 저마다 채도가 비슷한 초록색 아이템을 하나씩 몸에 지녔는데, 세월호의 노란 리본 같은 연대의 표시였다. 종종 걸음으로 부모를 따르던 아이들은 적막을 깨지 않으려 소곤댔다. 목줄을 한 개들도 흔한 낑낑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모두가 엄숙하고 침착했다. 때때로 참담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들도 지나갔다. 흥겨운 음악과 재치있는 문구가 넘실대는 여느 런던의 거리 시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90분간 이어진 침묵 행진은 두 해 전 이 지역에서 난 화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2017년 6월 14일, 런던의 부촌으로 알려진 켄싱턴ㆍ첼시구의 공공주택 그렌펠 타워에서 한밤중 발생한 불은 순식간에 7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세계2차대전 이후 런던에서 발생한 주거지 화재 가운데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은 사고였다. 피해자 대부분은 이민자, 난민, 유색인종이었다.
당시 저층의 냉장고 폭발로 시작된 불은 15분만에 24층 건물 전체를 삼켰다. 사고를 키운 건 비용 절감을 위해 사용된 값싼 외장재였다. 해당 소재는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 화기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사용이 금지돼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구 당국은 앞서 주민들이 선정한 내화성 외장재가 있었는데도 약 29만 파운드(4억 3,000만원)를 아낄 수 있는 문제의 외장재를 최종적으로 골랐다. 런던의 가장 부자 동네에서 시민의 안전을 돈과 맞바꾸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 사고로 켄싱턴ㆍ첼시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이 세상에 드러났다. 고급저택이 즐비한 이곳에 공공주택의 존재는 영국인들에게도 낯설었다. 사고 5개월 뒤 이 지역 유일한 노동당 구의원인 엠마 덴트 코드는 구내 같은 거리에 살고 있는 공공주택 세입자와 저택 소유주의 연간 소득이 평균 열 배 가까이 차이난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같은 나이트브릿지 구역 안에서도 건강 빈곤율이 0%에서 65%까지 차이가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밤마다 황금색 조명으로 뒤덮이는 해로스 백화점의 화려함은 이 지역 빈곤의 흔적들을 덮기 충분했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매겨졌던 이 참사에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매달 14일 열린 그렌펠 침묵행진은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 덕에 지속될 수 있었다.
2년 만에 현실이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렌펠 참사가 영국 내 건물 안전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지만 그렌펠 타워와 같은 종류의 외장재를 사용한 고층 공공주택은 아직 영국 전역에 최소 338채나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 대상을 민영 아파트로 확대하면 1만채가 훌쩍 넘는다. 이들 건물에 거주하는 다수가 저소득 층이라는 점에서 제2의 그렌펠 참사가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는 셈이다.
1990년부터 노스켄싱턴의 공공주택에 살고 있다는 주민 수잔 한남은 “지난 2년동안 당국이 뭘했는지 모르겠다”며 “(권력자들은) 기존 시스템을 악용할 줄만 알았지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수잔은 그날 밤 맨눈으로 봤던 불타는 그렌펠 타워와 며칠동안 대기를 떠다니던 검은재, 탄내 등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희생자 가운데는 딸의 친구도 있었다. 그는 “세계의 손꼽히는 부촌에서 국회를 지척에 두고 수십명이 그렇게 죽어나갔다는 사실에 여전히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이날 침묵행진 참가자들은 지난 2년동안 그랬듯 ‘그렌펠에 정의를(Justice for Grenfell)’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화재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그리고 불평등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행진하는 사람들의 결연한 표정과 서로를 위로하는 단단한 포옹에 어떤 희망이 있었다.
그렌펠 참사 이후 노스켄싱턴 지역 주민들은 공공 도서관이 소수를 위한 사립 초등학교로 바뀌는 것을 막았다. 또 지역사회에 직업훈련과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해온 월링턴컬리지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대형 대학에 흡수되는 것도 중단시켰다. 이전부터 거론되던 이슈였지만 그렌펠 참사는 부당함에 맞서 주민들을 결집시키는 분수령이 됐다.
이후 몇 년 전 없어졌던 푸드뱅크가 다시 문을 열었다. 사고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모임들도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이제 이들은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안다.
숱한 재난 현장을 취재했던 리베카 솔닛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재난은 그 자체로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 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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