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1924~)의 1980년 재선 선거 최대 걸림돌은 이란 대사관 인질사태였다. 그는 워싱턴 정가 최대 로비 집단의 하나인 유대인 단체들의 반발을 무릅쓰며 이집트-이스라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성사시켜 중동 평화의 가능성을 가시화했고,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도 대폭 진전시켰다. 하지만 경제문제 때문에 임기 내내 골치를 썩였고, 초선 임기 막바지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사태(1979.11~1981.1)의 초기 진압 실패 및 장기화로 민심을 잃었다. 재선에 실패한 카터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 외에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제도 및 국제사법재판소 설립-정상화를 위해 활동하며,여러 인권상과 노벨평화상(2002)을 탔다. 그는 퇴임 후에 더 미국인의 사랑을 받은 대통령이었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은 선거기간 내내 강경한 군사 개입을 통해 ‘위대한 미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호메이니 혁명 체제의 이란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며 카터의 미지근한 평화주의를 비판했다. 대선 마지막 TV토론 마지막 멘트로 유권자들에게 “나는 과연 4년 전보다 잘 살고 있는가? 자문해 보라”고 했던 레이건은 취임 후 레이거노믹스의 신자유주의 감세 및 복지 축소, 그레나다 침공을 비롯한 일련의 보수 강경 군사 외교로 일관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란 덕에 집권한 그도 임기 막판인 1987년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렸다. 이란에 본때를 보여야 한다던 그가 뒤로는 국내ᆞ국제법을 어겨가며 이란에 무기를 불법 수출해 그 대금으로 니카라과 우익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고, 그 돈의 일부가 마약자금으로도 쓰인 사실이 들통난 거였다. 1986년 6월 27일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레이건 정부의 콘트라반군 지원 및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 전복 시도에 대해 국제법 위반–피해 보상을 선고했다. 물론 미국은 그 판결을 묵살했고,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상임이사국 거부권을 행사했다. ICJ 판결은 구속력은 있어도 강제력은 없다. 1990년 우익 차모로 정권은 대규모 원조를 조건으로 미국과의 국제 사법적 앙금을 자진해서 걷어냈다.
지난해 10월 ICJ는 미국의 이란 제재가 “의약품과 식료품 등 인도주의적 필요와 민간 항공 안전 관련 제품에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과잉 제재를 견제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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