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2G폰 이용자 140만명, 2년뒤 서비스 종료 맞서 소송
◇“스마트폰 써봤지만 다시 돌아와”
휴대폰으로 두 시간 분량의 영화 한편을 단 10초에 다운로드 받는 시대. 휴대폰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짜릿한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의 세계에 빠져든다. 실감나는 영상은 물론이고 게임의 몰입도 또한 예전과 비교할 수 없다.
스포츠 팬이라면 어느 각도에서도 경기를 즐길 수 있으니 경기장 보다 더 실감난다. 찰나의 시간에 금융, 주식거래도 술술 해결된다. 현실이 된 5세대(Generation) 이동통신 시대의 일상이다.
그러나 2000년부터 20년 가까이 ‘011’로 시작하는 2G(음성통화, 문자, 저속 인터넷이 가능한 2세대 이동통신)폰을 고집하는 회사원 김은섭(54)씨의 일상은 다르다. 그는 오직 통화와 간단한 문자와 전자메일을 주고받는 용도로만 휴대폰을 사용한다. 스마트폰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요즘 세상과 거리가 있다.
그 역시 한 때 거금 100만원을 주고 최신 스마트폰을 써봤다. 그러나 불필요한 응용소프트웨어(앱)이 많고 사용방법도 복잡할 바엔 꼭 필요한 기능만 있는 2G폰이 낫다는 판단에 2006년 구입한 휴대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5년 전엔 단종을 대비해 예비용 2G폰도 사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카카오톡이 되지 않으니 불편하지 않느냐고요? 되레 직접 목소리를 듣고 통화하니 돈독한 인간관계 유지에 더 좋은 걸요. 컬러메일도 받을 수 있어 불편함도 없고요.”
“폰 좀 바꾸라”는 주변의 핀잔에도 김씨가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이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통신업계에 따르면 올해 5월말 현재 김씨처럼 2G폰을 사용하는 이동통신 가입자는 140만명 가량이다. 통신사 별로 SK텔테콤이 72만명, LG유플러스 이용자와 알뜰폰 사용자가 68만 가량으로 추산된다. KT는 2012년 1월 2G 서비스를 종료했다.
2G 서비스 가입고객 가운데 48만명 정도가 011과 016, 017, 018, 019 등 예전 번호를 여전히 쓰고 있다. 최소 16년 이상 ‘01X’ 번호를 쓴 가입자라 충성도가 아주 높다. 공짜폰과 보조금 등 이통사들이 다양한 혜택을 주며 3~5G 서비스로 갈아타기를 유도해도 꿈쩍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통사 입장에서 2G 서비스 유지는 부담이다. 주파수 사용료와 망 관리 비용 등으로 연간 수천억 원이 드는 반면 관련 수익은 그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가 허가한 2G 서비스의 주파수 할당은 2021년 6월까지다.
급기야 최근 예전 번호와 서비스를 사수하려는 소비자들이 2G 서비스를 종료하려는 이동통신사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달 630여명이 SK텔레콤을 상대로 2년 뒤 2G 서비스가 종료되더라도 3~5G 통신을 011, 017 등 기존 번호로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목소리를 낸 것. ‘이동전화 번호의 번호이동 청구’ 소송이다. 이른바 소멸하지 않을 권리다.
이들은 포털사이트에 ‘010통합반대본부’라는 카페를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 2차 민사소송과 함께 2년 뒤 2G 서비스를 종료돼 번호가 소멸되면 집행중지 가처분으로 맞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들이 법적 다툼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의 번호와 예전 서비스를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카페의 한 가입자는 “스마트폰이 편한 걸 몰라서가 아니라 011이란 번호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글을 올렸다.
20년 가까이 구축해 놓은 연락망 등 생계를 위해, 군 시절부터 유지한 군번과 같은 번호를 바꿀 수는 없다는 회원까지, 이들에게 ‘01X’는 단순한 식별번호가 아닌 삶의 일부와도 같다는 얘기다.
2G 서비스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들이 참여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는 추억의 이름이 된 삼성 애니콜이니 모토롤라 스타택이니 하는 예전 모델 구입과 수리 등 5G시대에 2G 마니아가 사는 방식이 총망라 돼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번호를 사수하기 위해 해외로 수출한 삼성, LG 등 국내 휴대폰을 역수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국내 업체가 2014년 이후 2G폰을 생산하지 않고 있는 탓이다.
일부 온라인 카페에선 해외 공동구매에 나서기도 한다. 국내에서 판매된 스마트폰은 2G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해외 수출품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휴대폰 튜닝’을 위해서다.
번호가 가진 저마다의 의미 말고도 2G폰의 장점이 꽤 많다고 이용자들은 말한다.
이들이 꼽는 첫 번째 장점은 가격경쟁력. 단말기는 비싸 봐야 5만원 선이다. 국내에 재고가 없어 해외 구매를 한다 해도 10만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급형 스마트폰의 가격이 100만원을 넘어선 것에 비하면 확실히 저렴하다.
데이터 사용량이 없다 보니 요금도 스마트폰 요금제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스팸 문자도 스마트폰에 비해 적게 온다”는 것도 2G폰을 놓지 않는 이유다.
대구에서 전자제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김상출(48)씨는 “조작이 쉽고 배터리 수명이 긴 것이 2G폰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6년 전 잠시 스마트폰을 개통하긴 했지만 한 손에 쏙 들어와 조작이 쉽고 잔고장이 없는 폴더폰이 자신에게 더 실용적이란 생각에 서랍 속에 모셔뒀던 삼성 애니콜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스마트폰에 비하면 사진 저장 용량이 작지만 컴퓨터로 옮기면 돼 아무런 불편 없이 사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퇴근 후 메신저를 통한 업무 지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 진다는 것도 2G폰 사용자들이 꼽는 장점 가운데 하나다. 디지털 시대를 역주행하니 저녁이 있는 삶과 가까워 지는 경우다.
◇수험생도 찾고 도ㆍ감청 우려한 정치인 등 애용
최근 들어 2G폰은 중고생을 둔 학부모의 자녀관리용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스마트폰 게임을 차단해 조금이라도 공부에 집중시키려는 목적이다. 강원 춘천시에서 휴대전화 매장을 운영하는 장문경(43)씨는 “학기초면 자녀의 휴대전화를 2G폰으로 교체하려는 중3, 고3 수험생 학부모들의 문의가 심심치 않게 온다”며 “이를 위해 01X 번호를 그대로 놔두는 고객도 있다”고 설명했다.
업계 안팎에선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가운데 상당수가 여전히 2G 서비스의 우수 고객이란 얘기도 들린다.
정치인들이 “번호가 바뀌면 오랜 기간 쌓아둔 인맥들이 혼란을 겪는다”는 이유를 대지만, 속내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3~5G 서비스에 비해 해킹, 도ㆍ감청 등에 대한 위험이 적어 2G폰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정보와 보안이 생명인 국가기관 관계자들도 2G폰을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퇴직한 수사기관의 한 관계자는 “정치인의 몇몇 측근이나 국가기관의 고위직 등 일부 핵심 그룹멤버들만이 공유하는 이른바 ‘세컨드 폰’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2G폰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박은성 기자 esp7@hankookilbo.com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