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5> ‘분단의 굴레’로 서훈 못 받은 독립운동가 4인
올해 ‘김원봉 서훈 논란’이 뜨거웠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어떻게 기억하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합의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이르면 색깔논쟁으로 번지기 일쑤이다. 일각에서 김구의 업적과 비견할 정도로 뜨거운 독립운동가였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 후 국가검열상(감사원장 격) 등에 올랐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삶을 불태워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나 사회주의 활동을 이유로 우리에게 잊혀진 독립운동가는 수 없이 많다. 사회주의자라고 해도 해방 전에 사망한 경우 서훈 대상이 되지만, 해방 후까지 생존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분단의 굴레’ 속에서 외면 받아 왔다. 그 중 탁월했던 독립운동 업적을 지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명을 꼽아봤다.
◇한글 투쟁의 총사령관 이극로
“조선말 사전이 있는 한 조선말과 조선 겨레는 없어지지 않는다.” 한글 사전 편찬은 조선어학회가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인 기획이었다. 1920년대 조선어연구회(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명) 시절부터 회원들은 ‘조선어 사전 편찬’을 준비했다. 이를 이끈 사람이 이극로(李克魯ㆍ1893~1978) 였다. 그는 1929년 10월 한글 사전 편찬을 전담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임됐다. 사전편찬 작업이 재정난에 부딪치자 건축업을 하는 부자 정세권을 설득해 1935년 자신의 건물을 조선어학회에 내 놓게 만든 것도, 사전편찬 비용을 확보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한 것도 그였다.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류정환은 이극로를 모델로 했다.
마침내 사전 원고 일부가 조판에 들어간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본 일제는 회원들과 관계자 33명을 체포하고 16명을 기소했다. 11명이 옥살이를 하다 2명의 한글 학자(이윤재ㆍ한징)가 사망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악랄한 민족말살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극로는 가장 무거운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해방 이틀 후에야 들것에 실려 감옥에서 나왔다. 그와 동료 한글학자들의 꿈이었던 ‘조선말 큰사전’ 1권은 1947년에야 출간됐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은 “독립운동의 방법에 김구의 임시정부와 같은 정치투쟁이나 김원봉의 의열 투쟁뿐 아니라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는 언어투쟁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극로 선생은 언어투쟁의 총사령관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박 소장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후 공백상태였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주시경 선생의 사망으로 미완으로 남았는데 이극로 선생의 주도로 표준말을 제정하고 사전을 편찬하며 단일 규범을 만들게 됐다. 일제시기 조선어학회가 한 일은 독립의 준비물이었고, 해방 후 바로 미군정 시기에 이들이 준비해 놓은 표준 규범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극로는 1920년대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엘리트였다. 1911년 만주 서간도로 가서 민족교육을 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했고,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 유학생 총무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도왔다. 이후 베를린대학 시절 조선어강좌를 개설해 유럽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독일 국립인쇄소에서 한글 활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의 조선대표 단장으로 참여해 일제의 총독정치를 비판했다(1930년대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역할, 박용규).
귀국 후 한글연구를 위해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조선어학회 상임 간사직을 맡았다. 맞춤법 통일안 발표(1933년), 서울말을 표준어로 정하고 어휘를 정리한 ‘사정(査定)한 조선표준말모음’ 발표(1936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발표(1940년) 등 굵직한 사업을 최전선에서 이끌었다.
이극로는 1948년 중도파 정당인 조선건민회 위원장 자격으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다 1978년 사망 후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북한 정권 수립의 기여했다고 분류되는 지점에서 김원봉과 같은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박용규 이극로연구소장은 “헌법에는 평화통일을 지향한다고 하는데, 북한정권에 대한 협조여부를 따지기보다 평화통일을 선도한다는 의미에서 더 포용적인 공훈심사를 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장재성
1929년 11월 3일부터 전남 광주에서 벌어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ㆍ1운동(1919년)과 6ㆍ10만세운동(1926년)과 더불어 일제시기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광주 한일 학생들의 충돌로 시작됐지만, ‘식민지 교육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요구하며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됐다. 그 중심에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졸업생 장재성(張載性ㆍ1908~1950) 이 있었다.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차별, 식민교육에 대한 불만,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 등으로 1920년대 학생사회에서는 동맹휴학(맹휴)이 대표적인 독립운동 방법으로 등장했다. 광주고보 재학생 장재성은 친구들과 1926년 11월 광주지역 중등학교에서 최초 학생 비밀 결사인 사회과학 연구모임 ‘성진회’를 만들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 해체됐고 장재성도 일본 주오(中央)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는 1929년 6월 대학을 중퇴하고 광주로 돌아와 학생 사회과학 연구모임의 조직화에 나섰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학생들을 밀치고 지나간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이를 목격한 광주고보 학생들과의 충돌이 벌어지고 11월 3일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광주중학교로 몰려가려 할 때 장재성은 시위운동을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1929년 광주학생운동, 김성민).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강석원 지사는 “장재성이 학생들의 투쟁대상을 광주중학교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으로 전환시켰다”고 회고했다. 이날 200여명의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중학교가 아닌 광주 시내 중심가로 행진했고, 시위행렬에는 광주농고와 전남사범학교,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가세해 300여명을 훌쩍 넘겼다. 일제는 72명의 한인학생을 검거해 62명을 검사국에 송치했다.
이후에도 장재성과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인 장석천 지사 등 시위 지도부는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12일부터 벌어진 2차 시위는 12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고 간도지방까지 번져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일제는 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가 전국 194개교라고 발표했지만 광주시교육청은 2006년 발간한 책자에서 참가 학교가 총 320개교라고 밝혔다. 2차 시위 후 26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된 장재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는 7년형을, 대구 항소심법원에서 4년형을 선고 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량이다.
그는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 대상자 208명에 포함돼 있었지만,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며 최종 탈락했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 등을 지냈고 분단에 반대해 세 차례 북을 오가다 1948년 검거돼 징역 7년형을 선고 받았다. 장재성의 최후는 참혹했다. 그가 광주교도소 복역 중일 때 6ㆍ25전쟁이 일어나면서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총살당했다. 국가보훈처는 “장재성은 올해 삼일절을 계기로 공적 심사를 했으나 포상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반면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징역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여동생 장매성(張梅性·1911~1993) 지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포상을 받았다.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은 자랑스러운 가족의 역사를 침묵하도록 만들었다. 장매성 지사의 며느리는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생전에 어머니(장매성)께서 일제 경찰에게 당한 고문으로 어깨를 다쳐 고생하셨다거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는 이야기만 간혹 하셨지 오빠의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장재성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며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지만 (사회주의자 논란으로) 세상이 좋은 뜻으로 인식하지 못하니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 조선의용군의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했던 김명시(金命時ㆍ1907-1949)에게는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 다르크’라는 이채로운 수식어가 붙는다. 김명시는 1939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조선의용군에 소속돼 최전방에서 여성부대원을 이끌고 선전활동과 병력 모집에 앞장서 이름을 떨쳤다. 해방 후 종로 거리 개선행렬에서 그가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에 이어 말을 타고 지나갈 때 시민들이 ‘김명시 장군 만세!’를 불렀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사회주의 운동가인 오빠 김형선의 영향으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중퇴한 후 중국에서 상해한인반제동맹 등을 조직하고 하얼빈 일본영사관 공격 등에 참여했다. 1932년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 재건활동 혐의로 체포돼 7년간 복역 후 만기 출소해 1939년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무정 장군 직속하의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원으로 일본 점령지구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해방 조국으로 돌아온 후 그의 존재는 더욱 널리 알려졌다. 1945년 12월 기자회견에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현황을 설명하고 “조선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해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위한 좌우 협력을 강조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김명시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하며 1947년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 사건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사단원으로 참여하고,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존 하지 준장에게 반탁시위 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48년 이승만 정권 수립 후 거세진 좌익 숙청 작업 시기에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1949년 10월 11일자 신문에 실린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 부평서 유치장서 자살’이란 제목의 기사가 그의 마지막을 간략히 설명한다. 이후 기사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은 ‘지난 10일 오전 5시40분경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에 있는 약 3척 높이 되는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었다’고 발표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고문치사인지, 자살인지 사인을 확인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했을 그의 가족들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독립운동가 연구에서 연좌제 등으로 인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찾기도, 가족 이야기를 듣는 것도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김명시의 고향인 경남 마산 지역 시민단체 열린사회시민연대는 ‘김명시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 운동’을 하며 신문에 광고까지 내 그의 후손과 묘소를 찾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열린사회시민연대 측은 “보훈처는 북로당 정치위원이라는 직함 때문에 서훈이 힘들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면서도 “올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계기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서 논의하겠다고 알려왔다”고 밝혔다.
◇국문학자이자 혁명가 김태준
일제강점기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인 김태준(金台俊ㆍ1905~1949)은 한국 문학사의 기초를 닦은 연구자였다. 20대이던 1931년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발표한 그는 경성제대 최초의 조선인 강사로 문학을 가르쳤고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발굴했다.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우리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입수한 뒤,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 보관 사실을 알렸다. 전형필은 김태준을 통해 이용준 측에 돈을 지불하고 사들여 한글 창제원리는 세상에 알려졌고 국보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다 김태준은 사회주의자인 이현상의 소개로 1940년 당대 대표적인 사회주의 단체 경성콤그룹(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에 가입했다가 검거돼 1941년부터 43년까지 옥고를 치뤘다. 이 사이 그의 노모와 아내, 아이는 모두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다. 출소 후 그는 항일 무력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사회주의자 박진홍과 함께 조선의용군이 주둔하던 옌안(延安)으로 떠난다. 1947년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실린 그의 마지막 저술 ‘연안행’에서 김태준은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 보는 책은 경제학ABC, 인터내셔널, 전기, 레닌 선집 등이었다. 나는 좀더 튼튼한 세계관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 조음(燥音)이 이타(耳朶)를 치는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며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해방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초대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문화부장에 임명됐고 남로당 간부로 문화공작과 특수정보 분야 지하활동을 했다. 예술인들이 ‘빨치산’을 지원하는 활동이었다. 그는 1949년 1월 경찰에 체포돼 11월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2007년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을 펴낸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혁명가로서 김태준은 해방 이전까지는 반제투쟁의 투사로 평가하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가 수많은 인명 살상을 몰고 온 만큼 공과가 뚜렷이 갈린다고 봤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일제강점기 김태준 선생의 행적은 명백히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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