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재윤의 삶’이라는, 서울에 사는 2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9컷짜리 만화가 올라왔다. 대단히 극적이지도, 그렇다고 대단히 사소하지도 않은, 보통의 일상을 포착한 짧은 이야기에 독자들은 무한 공감을 보냈다.
3년간 그러모은 ‘재윤의 삶’은 최근 동명의 그래픽노블로 출간됐다. 낮에는 회사를 다니며 착실히 돈을 벌고 때로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만화를 그리는 ‘재윤의 삶’은, 만화의 모델이자 화자인 정재윤(28) 작가의 그것과 오롯이 겹친다. 지난 9일 회사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 서울 이태원동에서 만난 정 작가는 “점심시간이 길어서 2시간은 인터뷰할 수 있다”며 웃었다.
홍익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정 작가는 졸업전시를 준비하며 삭막한 생활이 계속되자 단순히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일상에 대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는 등 정 작가의 삶이 진전됨에 따라 이야기 범주도 백수에서 직장인으로 확장돼 갔다. 여기에 브래지어나 생리, 성희롱이나 여성혐오 등 20대 여성이 주인공일 경우 당연히 따라붙을 수밖에 없는 화두가 주된 소재가 됐다. “그냥 가슴이 거기 있으니까 가슴을 얘기한다”는 식의, 지나치게 젠체하지도 혹은 지나치게 소모하지도 않으며 여성의 삶을 다루는 데 독자들은 열광했다.
“사실 저는 좀 슬프면서도 웃긴 것 같아요. (생리 같은 주제가) 인류의 반이 겪고 있는 일인데 지금까지 거의 얘기되지 않았다는 게요. 최근 들어서야 이런 얘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데, 어쩌면 저도 그런 분위기에 용기를 얻은 거죠.”
‘슬프면서도’ ‘웃기다’는 설명은 ‘재윤의 삶’을 관통하는 주된 정서다.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쉽게 조소하지 않고, 불행할 수 있지만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의연하면서도 유쾌하게 대처하는 생활의 감각. 일종의 ‘균형감각’이라 불릴만한 태도는 정 작가가 보기에 한국의 젊은 여성들 대부분이 갖는 감각이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실제의 나, 되고 싶은 나, 사회로부터 요구 받는 나 세 개의 축이 있다고 생각해요. 완성된 페미니스트이고 싶으면서도,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자의 모습도 갖추고 싶은 나 사이의 괴리가 결국 재윤의 삶 같아요. 그렇게 혼란을 겪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한 게 아닐까요”
‘재윤의 삶’은 SNS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출판만화로까지 이어진 사례다. 2017년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된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 역시 SNS에서의 폭발적 반응을 토대로 출간이 이뤄졌다. SNS 연재만화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장단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돈이 안되죠. 아무래도 전 생업이 있으니까 만화를 그리며 돈벌이에 초연해질 수 있었던 거지만, 운이 무척 좋았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독립연재공간과 SNS에서 동시에 새 만화를 연재하는 수신지 작가님처럼, 작가들이 플랫폼에 기대지 않고 만화를 그려나가는 흐름과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요.”
만화 ‘재윤의 삶’은 출판을 통해 한 매듭을 지었지만, 새로운 ‘재윤의 삶’이 이어진다. 곧 ‘일간 이슬아’의 이슬아 작가가 차린 헤엄출판사에서 장편만화 ‘서울구경’이 출간될 예정이다. 작가의 말은 이렇게 끝맺는다. “내 손을 떠난 것들이 이제 나를 끌고 간다.” 작가가 될 줄도 몰랐던 취준생 재윤이지만, 이제 ‘재윤의 삶’은 ‘끄는 힘’을 받아 미래를 향해 쭉쭉 나아간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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