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동의 없이 쓸 수 있는 예비비 “시급성 고려하면 지금 써야” 지적 
 정작 정부는 고려 안 해… 목적예비비 요건 안 맞고 일반예비비는 국정원에 절반 묶여 
홍남기(오른쪽)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안일환 기재부 예산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대근 기자

당정이 일본의 수출규제 확대에 대비해 소재ㆍ부품ㆍ장비 산업을 국산화하려는 목적으로 추가경정예산(추경)안에 3,000억원 이상을 증액하기로 했다. ‘연내 시급히 필요한 사업’이라는 명목인데, 일각에서는 추경은 국가부채를 그만큼 늘리는 요인인 만큼 정부가 재량으로 즉시 쓸 수 있는 예비비를 투입하면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정부는 예비비를 사용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15일 정부 등에 따르면, 국가재정법상 예비비는 ‘예산을 편성할 때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지출 또는 예산 초과지출을 충당하기 위한 경비 재원’을 뜻한다. 용도를 미리 정하지 않은 채 국회의 사전 승인 없이 긴급한 상황에 우선 집행할 수 있는 정부의 비상금으로 보면 된다.

이미 올해 예산에 반영돼 있어 빚(국채 발행)을 내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하다. 야당의 반대에 부닥쳐 국회에 제출한 지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추경이 통과되지 않아도 △예측 불가능성 △시급성 △불가피성 등 요건만 충족하면 언제든 집행할 수 있다. 정부 논리대로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대응이 시급하다면 예비비를 쓰는 것이 가장 빠른 대응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올해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예비비는 일반예비비 1조2,000억원과 목적예비비 1조8,000억원 등 총 3조원에 이른다. 때문에 산업 국내화를 위한 3,000억원은 충분히 예비비에서 조달이 가능해 보인다. 앞서 4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추경 편성 배경으로 “미세먼지에 대한 재원 소요가 몇 천억원 정도였다면 예비비로 충분히 수용 가능하나 조 단위로 넘어가면 예비비 수준을 넘어갔다고 봐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몇 천억원 정도’의 자금 마련을 추경에 매달리고 있다. 이유는 예비비가 실제로는 ‘비상금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일본의 경제보복 대응을 위한 자금은 △재해대책비 △인건비 △환율변동으로 인한 원화부족액 보전 경비 △산업위기지역ㆍ위기업종 재정지원 등 용도가 정해진 목적예비비에서 끌어 쓸 수 없다.

쓴다면 일반예비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예비비마저도 절반인 6,000억원 가량은 사실상 묶여 있다. 국가정보원의 활동비로 쓰이는 ‘안보비’로 무조건 배정하게 돼 있어서다. 기재부는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국정원에 안보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일반예비비도 각 부처의 조직ㆍ위원회 신설 등에 따른 운영경비, 국가배상금, 각종 경비 등에 쓰였거나 쓰기 위해 남겨둬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예비비가 별로 남지 않아 쓰고 싶어도 못 쓰는 형국이어서 추경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귀띔했다.

정부는 추경 증액을 통해 일본 경제보복에 대응하겠다면서도 국채 발행을 늘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애초 추경이 5월 통과를 전제로 했다가 통과가 늦어지면서 규모가 줄어든 사업들이 있는데, 이를 감액하고 일본 수출규제 대응 자금을 증액하면 국채 발행을 늘리지 않고도 6조7,000억원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존 사업을 구조조정 하고 일본 경제보복 대응을 위한 사업을 넣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당초 증액 규모가 1,200억원(10일 이낙연 국무총리 언급)에서 하루 만에 3,000억원으로 늘어나는 등 저간의 상황을 보면 ‘늘릴 수 없는 예비비보다는 국회 동의만 받으면 얼마든지 끼워 넣을 수 있는 추경에 우선 넣고 보자’는 주먹구구식 예산 편성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세종=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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