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 앞날 볼모 잡으려 한다는 판단에 강경 기류로…대국민담화도 검토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와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15일 수석ㆍ보좌관 회의에선 “양국 관계 발전의 역사에 역행하는, 대단히 현명하지 못한 처사”, “한반도 평화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우리 정부에 대한 중대한 도전”, “결국에는 일본 경제에 더 큰 피해가 갈 것임을 경고해 둔다” 등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첫 공개 발언이 있었던 8일 수석ㆍ보좌관 회의에서만 해도 “외교적 해결을 위해 차분하게 노력하겠다”고 밝히는 등 로키(절제된 대응) 전략으로 나서는 모습이었다. 10일 30대 기업 대표 등과 가진 긴급간담회에서도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더 이상 막다른 길로만 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촉구성 메시지를 보내는 데 그쳤다.
하지만 12일 전남 블루이코노미 경제비전 선포식에서 “불과 열두 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을 언급하면서부터 기조가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상 일본과의 경제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그에 앞서 국론 통합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무렵부터 청와대 참모들도 일본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듯한 발언을 내놓기 시작했다.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출장을 갔던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은 13일(현지시간) 귀국길에 “1910년 국채보상운동과 1997년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했던 것처럼 뭉쳐서 이 상황을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학 농민혁명 당시 일제에 맞선 의병을 소재로 한 노래 ‘죽창가’를 공유했다가 논란이 됐다.
우리 정부의 기조 변화는 일본이 내달부터 한국을 ‘화이트(백색) 국가’에서 제외해 1,112개 핵심 부품ㆍ소재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키로 하면서, 우리 경제의 앞날을 볼모로 삼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은 게 결정적 계기였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 정부가 선도산업으로 육성키로 한 비메모리 반도체ㆍ수소차 등에서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차제에 일본의 억지 주장에 단호하게 맞서지 않을 경우 오히려 경제보복을 장기화할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화이트 국가 제외를 포함해 우리 기업의 피해가 현실화할 경우 문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 나서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 경우 한일 경제전쟁이 전면화 하는 것을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일본이 소니 등을 앞세워 선진국들을 추월하려 하자,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환율을 규제해 힘으로 일본을 주저앉힌 전례가 있다”며 “일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일본 고위층이 전략물자 밀반출 및 대북제재 위반 의혹을 거론한 것도 청와대가 강경 기조로 돌아선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이 북미 비핵화 대화의 촉진자 역할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도발이 동북아 안보 협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만 청와대의 대일 메시지가 갈수록 강경해지면서 외교적 해법을 도출해야 할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반일 감정에 기대 스스로 협상 가능성을 닫아버린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적지 않다. 한일관계가 강대강 대치로 흐르면 우리 피해가 더 클 수 있는 만큼 지금은 정치적ㆍ외교적 역량을 보여줘야 할 때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가 고민하지 않고 노래 부르고 페북질 하고 이런 것들이야 지금 일단 공감은 가지만 전략가들이 할 일은 아니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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