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용으로 변질되는 친일 개념
대통령 비판이 아베를 돕는 건 아냐
내향적 역사관의 방향을 바꾸기를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가 시작되지 앞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문 대통령,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연합뉴스

한 학생이 위안부 문제로 글을 써왔다. 뉴스 가치가 있는 기획기사를 쓰라는 과제였다. 수업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데, 미국 대학생이 이 주제를 잡은 게 뜻밖이었다. 농장에서 자라서 어릴 땐 “세상에 인간보다 젖소가 많이 산다”고 믿었다는 학생이다. 잠깐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도 했지만 오해였다. 스터디그룹에서 오래 공부해온 현안이고, 꽤 큰 학회에서 논문 발표도 했다고 한다. 제목은 대략 ‘#미투 시대에 재조명되는 아시아 위안부 문제’인데, 그에 따르면 위안부문제는 오늘날 미국의 정치사회 문제와 공통점이 있다. 가해자의 철저한 부인, 그리고 권력이나 집단이 거짓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게 미투와 위안부를 관통하는 초점이라고 했다.

그렇게 학기가 끝나고 일본의 기습적 경제 보복이 시작돼 정부 고위 인사들이 쏟아내는 역사적 은유들을 접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최재성 의원이 의병운동을, 문재인 대통령이 12척의 배로 명량대첩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죽창가로 동학농민혁명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마음이 울리지 않는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역사는 자랑스러움인 동시에 트라우마다. 그러니까 의병 프레임이 작동하면 일본에 대한 증오와 이를 극복한 역사와 함께, 관군의 무력, 정부의 무책임, 그리고 국익보다 왕권에 집착한 임금이 떠오르게 된다. 프레이밍은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는 사고의 틀로 현상을 해석ᆞ판단하면서 대안을 생각하게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한 인사들이 현 국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알고 있는지 의문이 그래서 생긴다. 재정확장을 주장해온 정부가 국채보상운동을 얘기하는 것도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국토가 유린당하고, 국권을 잃은 그 역사와 현재가 비슷한 것인지도 동의하기 어렵다. 더 반대하고 싶은 것은 그런 상황 인식에서 나오는 정부 비판이 친일 행위라는 주장이다. 실명, 또는 익명으로 이 논리가 전파되고 있다. 장외에서 얘기되던 토착 왜구라는 개념은 어느덧 실명에 따라붙는 꼬리표가 됐다. 정적의 악마화는 세계적 추세지만, 우리의 경우는 역사관과 주변 정세가 맞물려 가상현실이 실현되는 수준으로 번지고 있다. 비판자에게 “아베보다 문재인 대통령을 더 미워하는 사람들”이라는 낙인을 찍으면 정치는 한없이 경직된다.

경쟁 상대는 이겨야 할 대상이지만 적은 파괴해야 할 대상이다. 경쟁 상대와의 타협은 명예일 수도, 이로울 수도 있지만 적과의 타협은 수치이자 굴복이다. 적에 대해선 규칙을 어겨서라도 이겨야 하지만, 정치는 반복되는 게임이기에 신뢰와 규칙이 없으면 마비된다. 최근 미국 정치의 퇴화를 개탄하는 사람들은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을 비교한 책, ‘자매혁명(Sister Revolutions)’을 인용한다. 저자 수전 던은 테르미도르 반동 직전 프랑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의 정적과 국민의 적 사이엔 아무런 차이점이 없어졌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과 일본 편을 드는 것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비판자가 곧 친일파는 더욱 아니다. 과거 독재 하에서 대북 정책을 비난한 사람이 빨갱이가 아닌 것처럼. 분열을 선동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중도층을 얻기보다 극단론으로 자기 진영 내부의 헤게모니를 쥔다. 그래서 현대정치에선 손가락질 받는 쪽보다, 손가락질 하는 쪽이 악마인 경우가 많다.

친일파 논쟁 때문에 대일 정책에서 지도자의 재량권이 좁아지는 부메랑이 자꾸 돌아온다. 어떤 나라와의 관계든 위협과 기회는 공존한다. 그런데 반일 구호에 이의를 달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여론이 수용할 수 있는 스펙트럼은 좁아졌다. 지도자가 풀어야 할 여러 매듭 가운데 하나다.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카드는 얼마든지 있다. 의병이나 농민혁명 쪽은 민간에 맡겨달라. 2류 역사 담론은 언제나 있다. 그게 우리를 대표하게 되면 세계사에서 우리 몫을 찾지 못한다. 21세기에 왜구 얘기하는 것도 이상한데, 그게 우리나라에 더 많다면 다른 나라 젊은이들이 웃지 않겠나.

뉴욕주립 코틀랜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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