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 소품을 눈 여겨 본 적 있나요? ‘공연 무대에서 쓰이는 작은 도구’를 뜻하지만, 그 역할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소품으로 공연을 읽어 보는 이야기가 격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찾아 옵니다.
“이건 똥차가 아니라, ‘그리스 라이트닝’이야.”
뮤지컬 ‘그리스’의 등장인물 케니키는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 3개를 하며 번 돈으로 구입한 중고차에 ‘그리스 라이트닝’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준다. 엔진 말고는 멀쩡한 부분이 없는 이 낡은 차는 똥차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차를 갖겠다는 꿈을 위해 케니키가 흘린 땀을 생각하면, ‘그리스 라이트닝’은 똥차라 불리기엔 아깝다. 10대들의 꿈과 열정, 우정과 사랑을 다룬 뮤지컬 ‘그리스’에서 ‘그리스 라이트닝’은 주제를 온전히 품고 있는 소품이다.
뮤지컬 ‘그리스’는 여름방학이 끝난 라이델 고등학교에서 대니와 샌디가 재회하며 겪는 우여곡절을 주축으로, 남학생들로 이뤄진 ‘티버드’파와 여학생들로 구성된 ‘핑크레이디’파 학생들 저마다의 사연을 그린다.
케니키와 친구들은 타이어 휠과, 차문 등을 여기저기서 구해와 낡은 녹색의 ‘그리스 라이트닝’을 새차처럼 탈바꿈시킨다. 뚜껑을 날려 오픈카를 만들고, 빨갛게 덧칠하며 헌차를 새롭게 변신시키는 과정을 담은 넘버 ‘그리스 라이트닝’은 뮤지컬 ‘그리스’ 속에서 가장 흥이 넘치는 대목이기도 하다. 차가 변신하는 동안 무대 위에는 이 모습을 3D로 구현한 LED 영상이 나오고, 이어 빨간색으로 바뀐 ‘그리스 라이트닝’이 등장해 극적 효과를 낸다.
국내에서는 2003년 초연된 뮤지컬 ‘그리스’에서 이렇게 두 대의 완전한 자동차가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는 자동차 앞부분만 제작해 무대 앞뒤를 왔다 갔다 하거나, 혹은 차의 한 면은 헌차 다른 면은 새차로 나눠 제작해 차의 옆면만 보여주는 방식 등을 썼다. 올해 27번째 프로덕션으로 처음 대극장 무대로 옮겨 오면서 ‘그리스’는 세트와 소품을 대형으로 시도해볼 수 있었다.
‘그리스 라이트닝’의 존재감도 커졌다. 극의 중심에 있는 대니와 샌디가 갈등하고 화해하는 과정 속에도, 대니가 케니키 대신 자동차 경주에 나가 우정을 확인할 때에도 ‘그리스 라이트닝’이 무대 위에 등장한다. 특히 자동차 경주 장면은 대극장으로 옮겨 오며 이번에 처음 추가된 것이다. 제작사인 오디컴퍼니 관계자는 “원래는 ‘그리스 라이트닝’이 1막에서만 등장했지만 경주 장면을 넣다 보니 차에도 더 힘을 주게 됐다. 주위 영상이 해상도 높은 LED이라서 차량의 색감도 강렬하게 제작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주 장면에서는 배경에 영상을 비쳐 차가 달리는 듯한 효과를 빚어냈다. 배우가 핸들을 꺾으면 바퀴 방향도 따라서 달라질 만큼 정교하게 제작됐다.
하지만 ‘그리스 라이트닝’은 어디까지나 소품이다. 실제 차량보다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철 프레임이 토대이고, 레이저로 정교하게 깎은 스티로폼으로 차체를 만들었다. 헌차는 우레탄 코팅 위에 도색을 바로 해 오래된 차의 부식된 질감을 살렸다. 새차는 특수 도장 작업을 추가해 막 공장에서 나온 차처럼 반짝이는 표면효과를 줬다. ‘그리스 라이트닝’은 약 한 달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됐다. 스티로폼으로 만든 차는 시간이 갈수록 갈라지고 부서질 수 있어, 매번 보수를 하며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극의 말미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된 등장인물들은 ‘그리스 라이트닝’을 향해 “세상 끝까지 달려라. 우리의 꿈을 위해 달려”라고 노래한다. 1950년대 미국을 시공간으로 한 뮤지컬이라 구시대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꿈을 향한 10대들의 마음을 울리기엔 충분하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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