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짜오! 베트남] “베트남이 EU와 FTA에 서명한 건, 중국과 다른 길 간다는 신호”

입력
2019.07.25 04:40
17면
0 0

<69> FTA

이창휘 국제노동기구(ILO) 베트남 사무소장이 자신의 집무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가리키면서 과거 호찌민 정부가 채택한 노동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창휘 국제노동기구(ILO) 베트남 사무소장이 자신의 집무실 벽에 걸린 사진들을 가리키면서 과거 호찌민 정부가 채택한 노동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6월말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에 서명한 베트남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으로도 향후 적지 않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베트남이 EU의 요구를 수용하고, EU가 베트남의 국제협약 이행 의지를 평가한 결과물이 유럽연합베트남FTA(EVFTA)이기 때문이다. 앞서 EU는 노동자들에게 결사의 자유와 단체 협상권 보장을 베트남에 요구했고, 복수노조 설립 허가를 의미하는 이 대목에서 베트남은 버텼다. 지난 2015년 협상을 끝내놓고도 4년이 지난 뒤에 서명식이 열린 이유다.

베트남이 EU의 요구에 전향적으로 나선 데 대해 이창휘(57) 국제노동기구(ILO) 베트남소장은 “베트남이 ‘중국과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이 소장은 EVFTA 협상 및 서명 막후에서 활약한 인물로, 1996년 글로벌 노사관계 연구 프로젝트로 ILO에 합류, 제네바 본부, 아시아지역 본부 등을 거친 아시아지역 노동 전문가다. 지난 2015년 9월부터 베트남 소장직을 맡고 있다.

이 소장은 “베트남 지도부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도 국제규범 준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공산당 일당체제에서 결사의 자유와 공산당 산하 노조가 아닌 노조를 허용한 것은 일종의 모험과도 같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다른 분야의 ‘복수’ 체제를 촉발할 수 있는 노동분야의 ‘복수’를 허용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내부의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EU와의 FTA 체결로 베트남 사회 시스템은 중국과 이제 더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결사의 자유와 단체 협상권 보장으로 현지 기업들의 활동이 크게 힘들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소장은 “과거엔 파업이 연 800건씩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EVFTA를 계기로 그 같은 파업도 단체협상, 협의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소장은 노동집약 산업 현장에서는 부담이 늘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단체 협상권이 제대로 작동할 경우 노동자들의 소득이 증가한다”며 “인건비 의존 비율이 높은 봉제업의 경우 비용상승 압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큰 차원에서 보면 베트남도 한국, 대만 등이 갔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라며 “저임금에 의존하는 시대에서 벗어나 산업구조의 다양화, 경제구조의 고도화를 촉진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의 ‘사드 사태’를 목격한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고속 성장하고 있는 베트남이 언젠가는 중국처럼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소장은 “중국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13억 인구라는 거대한 내수시장의 힘 덕택이었다”며 “그 조건을 갖추기 힘든 베트남이 한국 기업들에게 그렇게(적대적으로) 나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또 소득 수준 향상에 따라 향후 불거질 수 있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문제와 관련해서도 “항불, 독립 전쟁에 나섰던 화가가 총을 들고 산속에서 싸우면서도 프랑스 인상주의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며 “그들은 과거를 포용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만큼 가능성은 작다”고 내다봤다. 그는 또 “이런 포용성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가능하게 했고, EU를 설득해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라며 “일본에 대한 한국의 역사 인식 방식을 베트남에 적용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_막판까지 무엇이 쟁점이었나.

“노동분야, 특히 결사의 자유 및 단체협상권 보장이 핵심 쟁점이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협상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당과 정부 차원의 심도 있는 논의가 있었고, 베트남 국회가 6월 14일 단체협상에 관한 ILO 핵심협약 98호 비준안을 통과시키고, 단계적인 결사의 자유 도입을 포함한 노동법 개정안을 올 10월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함으로써 돌파구가 열렸다.”

_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권은 무역 협상과는 관계가 크지 않아 보이는데.

“자유무역은 경제성장을 촉진시킨다. 문제는 그 성장의 효과가 한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게 고르게 향유될 것인지, 환경 및 노동권 존중을 포함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촉진하는지 여부다. 이런 논의 끝에 △아동노동 금지 △강제노동 금지 △차별금지 및 양성평등 △결사의 자유 보장 등 4개 사항에 대한 8개 협약은 세계무역시스템에 참가하는 모든 ILO 회원국이 준수해야 한다는 ‘노동 기본권리와 원칙에 관한 선언’이 1998년 채택됐다. 이후 ‘1998년 ILO 선언’은 다양한 무역협정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특히 CPTPP와 EU의 FTA는 ‘1998년 ILO 선언’의 준수를 훨씬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_EU가 특별히 베트남에 깐깐하게 군 이유는.

“EU FTA 협정문에는 ‘8개의 핵심협약 중 비준이 안된 협약의 비준을 위해 지속 노력한다’는 내용이 있다. EU 회원국들 사이에 EU와 FTA를 맺은 한국 등 여러 나라들이 이 약속을 저버리고 있다는 비판이 고조되어 있었다. ‘한국이 저 상황인데 베트남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식이다. 베트남에 FTA 서명 전에 신뢰할만한 조치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실제 현재 한국은 EU와 FTA 분쟁조정 절차에 있다. 2010년 한EU FTA 서명 당시 한국은 8개 핵심협약 중 4개에 대해서만 비준이 된 상황이었는데, 9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는 이유다. EU는 한국정부가 비준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8개 핵심협약 중 일본과 싱가포르는 EU와 FTA 서명 당시 6개씩, 베트남도 98호를 비준하면서 6개의 노동관련 협약을 지키게 되는 셈이다.

이창휘 ILO 베트남 사무소장이 베트남이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창휘 ILO 베트남 사무소장이 베트남이 유럽연합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_베트남이 EU 요구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우선 EU 시장에 대한 접근 용이성이다. 베트남은 중국, 한국, 일본과의 교역에서 나온 적자를 미국 및 EU와의 무역에서 만회한다. 그런 점에서 인구 5억2,000만의 세계 4대 시장에 대한 용이한 접근은 중요하다. 또 국제규범 준수에 대한 지도자들의 강한 의지다. 경제성장의 성과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쟁점이 됐던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더라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대내외적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베트남은 중국과는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_ ‘중국과 다른 길’은 무엇인가.

“같은 공산당 일당체제이지만 베트남은 입법부의 상대적인 자율성 등 많은 민주주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단계적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노조 조직 및 가입의 선택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이로써 베트남의 사회 시스템은 중국과 더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공산당 일당 지도체제라는 안정적인 반석 위에서 풀뿌리 조직의 민주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시험이다.”

_베트남 측을 어떻게 설득했나.

“무엇보다도 지난 20년간 ILO가 베트남의 정부 및 노사단체 그리고 당과 쌓아온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결사의 자유’는 호찌민 전 주석이 1919년부터 주창해왔고, 1947년 호찌민 정부가 채택한 노동법도 결사의 자유와 단체 협상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과 정부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EU가 FTA 서명 조건으로 베트남에 요구하고 있는 협약은 호찌민 주석이 이미 주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호찌민 주석은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휴머니스트였다. 김일성, 스탈린과는 다르다.”

_결사의 자유와 단체 협상권 보장으로 파업이 빈번해지지 않을지.

“과거 연 800건씩 있었지만 지금은 안정적이다. 이제까지 모든 파업은 노조가 아닌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자연발생적인 파업이었다. 결사의 자유 및 단체 협상권의 강화는 이런 자연발생적인 파업을 질서 있는 단체협상 및 노사협의로 유도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본다. 물론 정부, 사용자 및 사용자 단체, 기존 노동조합 등 모든 당사자들이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향후 ILO 업무도 여기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_노사관계 개혁이 베트남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선진국들의 발전 경험을 보면, 건강한 노동조합과 유연한 단체 교섭제도는 생산성 향상 촉진뿐만 아니라, 노동과 자본이 성과를 보다 균형 있게 나누어 갖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현재 베트남의 무역 의존도(GDP에서 총 교역액이 차지하는 비율)가 200%가 넘는다. 이런 수치는 싱가포르, 홍콩과 같은 도시국가에서만 관찰되는 현상으로, 인구 1억의 나라에서는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라도 내수를 키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득도 점진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노사관계 개혁은 생산성 향상, 그에 따른 노동자들의 소득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_가파른 임금 상승에 기업들 걱정이 많다.

“봉제업과 같은 단순 노동 집약산업 현장에서는 비용상승 압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차원에서 보면 한국, 대만 등 다른 나라들이 갔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저임금에만 의존하는 시대는 저물어고 있다. FTA 체결에 따른 경제성장의 가속화, 산업구조의 다양화, 그리고 인력부족의 심화는 베트남 경제구조의 고도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이 소장은 ‘호찌민을 가장 잘 아는 외국인’으로 현지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베트남 전문가이기도 하다. 한국과 관련된 다소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 소장은 ‘호찌민을 가장 잘 아는 외국인’으로 현지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베트남 전문가이기도 하다. 한국과 관련된 다소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_중국의 사드 사태를 목격한 기업들이 베트남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할 것을 우려한다.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중국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첫째 13억 인구이라는 거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한 바게닝 파워(Bargaining Powerㆍ교섭력) 덕택이었다. 인구 1억의 베트남에는 그런 힘이 없다. 둘째 중국은 개혁개방 이전 사회주의경제 시절에 이미 수소폭탄을 만들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자동차를 만들던 나라다. 즉 상업화에 실패했을 뿐, 핵심 기술은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이를 바탕으로 다국적 기업을 끌어들여 시장화에 성공했고, 거대내수시장을 미끼로 다국적 기업에 압박을 가한다. 베트남에는 그런 조건이 없다.”

_베트남도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과거사’를 들고 나올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베트남의 역사 인식 방법은 우리와 다르다. 1950년대 초반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화가는 총을 들고 산속에서 싸우면서도 고흐, 세잔느 등 프랑스 인상주의를 산속에서 자신의 미대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들은 과거를 포용하고 현재를 살아간다. 그들 마음 속에서 역사는 연속한다. 이런 포용성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가능하게 했고, EU를 설득해낼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이다. 일본에 대한 한국의 역사 인식과는 차이가 있다.”

_앞으로 남은 절차는.

“베트남은 연내 비준을 다짐한 만큼 문제는 유럽이다. EU 집행부 및 의회가 새로 구성되고 있는데 해당 상임위인 EU 무역위원회가 어떻게 꾸려지는지도 중요하다. 집행부 교체 직전에 서명이 이뤄진 것은 정말 잘 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 국회가 회기 중에 ILO 협약 98호 비준을 결의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번에 못했더라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노이=글ㆍ사진 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