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화이트리스트 제외 강행땐 美 ‘日 나쁘다’고 생각 바뀔 것”
국무부도 “한일이 해결해야” 압박… 美 행보가 日 제동 걸지 촉각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할 가능성이 높은 일본 정부의 각의 결정을 하루 앞두고 한일 갈등 해결을 촉구하는 미국의 메시지가 계속되고 있다. 한일 갈등의 추가 악화를 막으려는 미국의 행보가 일본 정부의 강경 입장에 제동을 걸 수 있을지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한일 외교장관이 1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열리는 태국 방콕에서 대면했지만 서로의 간극만 확인하고 돌아서면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떠맡은 중재 역할의 무게감은 더욱 커졌다. 이날 오전 방콕에 도착한 폼페이오 장관은 2일 오후 3시30분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장관을 만난 후 오후 4시 강경화 외교장관과 회담한다. 곧이어 오후 4시30분에는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전망이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아세안 의장국인 태국의 돈 쁘라뭇위나이 외교장관과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내일 양 국 외교장관과 만날 기회를 가질 것이며 오늘도 고노 다로 외무상을 2~3분 가량 만났다"며 "우리는 한일 양국이 함께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우리는 양국이 지난 몇 주간 발생한 갈등을 완화할 방법을 스스로 찾을 것으로 매우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일간의 휴전과 협상 테이블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한일이 ‘분쟁 중지’의 신사협정을 맺으면 한일 갈등은 극적으로 협상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입장을 굽히지 않는 일본 정부가 한미일 회담 이전에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을 내리면 3국 회담은 서로의 입장을 항변하는 자리로 끝나게 된다. 일본 각의는 2일 오전 10시 이전에 마무리될 예정이어서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이 이 자리에서 이뤄진다면 오후의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은 빛이 바래진다. 이 경우 어렵게 중재안을 끄집어낸 미국의 체면은 구겨지고, 한일 관계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한 미국의 메시지는 당장 일본 정부로 향하는 기류다. 아사히(朝日) 신문은 이날 미국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한일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 나쁘다’고 생각해왔지만 아베 정권이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강행하면 미국의 입장이 ‘일본도 나쁘다’고 바뀔 것”이라는 미 정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다소 방관해왔던 미국 정부가 적극 나선 것도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도가 넘는 조치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 미국 국무부는 이날 미국의 중재 역할을 묻는 한국일보 질의에 “한국과 일본은 민감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라며 “미국은 가까운 친구이자 동맹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이다”고 밝혔다. 국무부는 최근까지 한일 갈등 문제에 비슷한 입장을 밝히면서도 “우리는 두 나라 모두 역내 주요 사안들에 집중하라고 또다시 촉구(encourage)하는 것 말고는 중재할 계획이 없다”고 단서를 달았으나 이 같은 언급은 뺀 것이다. ‘한일이 민감한 이슈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부분도 데이비드 스틸웰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7월 중순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근본적으로 한일이 민감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말한 원론적 입장에서 시급한 어조로 미묘하게 바뀐 대목이다. 코 앞에 다가온 일본의 화이트 리스트 배제 조치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
당초 워싱턴 외교가에서도 한국 정부가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를 잘못 다룬 것이 한일 갈등을 촉발시켰다고 보는 시각이 강한 편이었지만, 최근 일본의 무리한 보복 조치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면서 미국의 적극적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잇따르고 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이날 포브스 기고문에서 미국은 한일 갈등을 방관해선 안 된다며 “첫번째로 미국이 일본에 한·일 경제의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을 중단하고 한국을 신뢰하는 무역 상대국으로 대접하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한국에 대해선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징용 관련 일본 기업의 자산을 묶어두려는 노력을 중단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미국의 중재 움직임을 일본 정부가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일 관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발신하지 않은 것이 일본 정부가 기본 입장을 바꾸지 않는 배경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9일 한일 양국이 요청하면 개입하겠다는 다소 애매한 언급만 내놓은 뒤 이 사태와 관련해 입을 열지 않고 있다. ‘톱다운식 해법’을 즐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나서지 않는 이상 미국의 중재 움직임에 힘이 실리지 않은 것으로 일본 정부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코드에 충실해온 폼페이오 장관이 중재에 나선 만큼 일본 정부도 이를 마냥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