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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 칼럼] 우리가 미국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

입력
2019.08.04 09:00
수정
2019.08.04 16:28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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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5월18일 오후 서울 한 호텔에서 회동하고 있다. 클린턴은 재임 중 대북정책 조율 과정에서 DJ의 식견과 의지에 감명받아 DJ를 깍듯하게 예우하고 존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009년 5월18일 오후 서울 한 호텔에서 회동하고 있다. 클린턴은 재임 중 대북정책 조율 과정에서 DJ의 식견과 의지에 감명받아 DJ를 깍듯하게 예우하고 존중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래 전 일이 떠오른다. 1996년 9월 러시아 신문에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심장병 수술을 앞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모스크바 북쪽 자비도보 별장을 방문했다는 단신 기사가 떴다. 현안은 전혀 논의되지 않았고, 오로지 거구의 두 정상이 손을 맞잡은 사진이 “건강해지면 내년 바이칼 호수에서 휴가를 함께 보내면서 낚시도 하자”는 콜 총리의 따뜻한 말과 함께 실렸다. 짧은 기사였지만 여운은 길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근무했던 한 우리 외교관은 “독일은 통일 이후 새 질서를 구축하는데 러시아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했다. 한걸음에 달려온 콜 총리를 누가 싫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뚱뚱한 두 정상을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에 겹쳐본다. 독일과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인명피해만 최대 3000만 명이나 되는 처참한 관계였다. 그런 악연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상대의 목줄을 겨냥하는 도발은 하지 않았다.

아베, 보편적 양식 버리고 군국주의 후예처럼 행동

콜 총리 일화를 소개한 것은 아베가 배웠으면 해서다. 한때 일본도 양심적이고 지성적인 행보를 했었다.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의 공동선언에서 일본은 뼈에 사무치게 사과한다는 ‘통절(痛切)한 반성’이라는 표현을 담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위한 광범위한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일본 지도자들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듭했고 침략 역사를 왜곡한 중고교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켜 한국을 자극했다. 우리는 일본이 독일이기를 바랐지만, 아베 등 일본 지도자들은 평화를 지향하는 보편적 지성보다는 패전의 아픔을 되씹으면서 군림하는 나라 쪽으로 가려고 기를 쓰는 군국주의의 후예처럼 보인다.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사방에서 우리를 향한 도발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이 사드를 강요하면 우리는 찬반으로 갈려 싸우다 질질 끌려가듯 배치하고, 이에 반발한 중국이 우리 기업에 보복을 가하면 분노하고, 러시아 군용기가 국경을 침범하면 항의하는 형국이다. 심지어 정성을 기울인 북한마저 미사일을 마구 쏴대고 있다. 그저 힘을 키우자고만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일만 터지면 저자세로 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미동맹 흔들릴 때 한반도 위기 초래

가히 사면초가라 할 수 있는 위기 국면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선 4강 외교가 가장 잘 작동되고 특히 한미동맹이 공고했던 DJ 집권 시절의 외교를 참조해볼 필요가 있다. DJ는 외교의 전략적 목표를 한반도 평화, 경제적 번영에 두었다. 4강과 불편하고, 특히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한반도 정세는 위기를 맞게 되고, 그 여파가 우리 경제에 직격탄으로 돌아온다는 게 확고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미동맹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미국을 대함에 있어 최우선시한 덕목은 일관성이었다. 전임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정책에서 민족 우선을 했다가 “핵을 가진 자들과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냉탕과 온탕을 수시로 오갔다. 그 결과 1994년 미 클린턴 정부가 막판에 취소했지만 대북 폭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YS 정부에 정보를 주지 않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DJ 집권 후 2년여에 걸쳐 페리 국방장관을 매개로 이루어진 대북정책 조율 과정에서 DJ의 식견과 의지에 감명을 받았고 이후 양국 관계는 술술 풀렸다. 1999년 9월 워싱턴 정상회담 오찬에서는 클린턴이 DJ에게 세르비아 중국 대사관 오폭 사건, 중국의 WTO 가입 신청에 대해 의견을 구하고 DJ의 조언대로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두 지도자의 신뢰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의 장례식 후 리셉션에서 각국 정상들이 다 입장한 상태에서 클린턴이 DJ를 에스코트하면서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DJ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데는 그의 명성이 한몫 했지만 미국의 전폭적 지원도 큰 도움이 됐다.

생각 다른 부시 설득한 DJ의 외교 복기 필요

그런 DJ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2001년 3월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 후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DJ는 기자회견장에서 부시로부터 손아랫사람에게나 쓰는 ‘디스 맨’이라는 모욕을 당할 정도로 곤욕을 치뤘다. 부시는 철저히 북한을 불신했고, 쳐부숴야 할 악의 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DJ의 포용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후 DJ는 자신이 당한 모욕에 분개하지 않고 부시를 설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당시 그를 옆에서 보좌했던 정태익 전 외교안보수석, 박선숙 전 홍보수석 등은 자세한 일화들을 얘기하며 “눈물 날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 결과 부시는 그 해 가을 상하이 APEC 정상회의에서 DJ의 대북 포용정책을 이해한다고 밝혔고, 이듬해 한국 방문 때 도라산에서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공언했다. 민주투사이고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세계적인 지도자인 DJ가 텍사스 출신의 건달 같은 부시에게 정성을 기울인 까닭은 미국이 최강국인데다 우리 운명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일본과의 갈등도 입체적으로 보면, 우리의 4강 외교에 뭔가 허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나 아베, 시진핑, 푸틴 등 4강 지도자는 DJ 집권 시절의 클린턴, 오부치 게이조, 장쩌민, 옐친과 달리 패권적이다. 그러나 외교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적대적이면 대한민국은 갈 곳이 없다. 지금 우리가 사면초가의 처지이거나 그럴 위험이 있다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미국이다. 미국이 우리를 이해하고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주변국과의 분쟁이나 갈등에 휩싸였을 때 든든한 동맹으로 남기를 바란다면 ‘눈물 날 정도’라는 DJ의 부시 설득 일화를 당시 참모들로부터 들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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