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적도의 한인들] <상> 발견 5년 만에 찾아간 印尼 위안소 상>
-부인은 일본을 따라온 것입니까, 아니면 일본이 강제로 데리고 온 것입니까?
“일본은 거짓말을 했지요. 그들이 말하기를 학교에 보내 준다고 했는데, 아…”
-부인은 언제, 어디서 속았다고 알게 되었습니까?
“플로레스, 키사르에서 알게 되었지요. 나는 계속 울어야만 했습니다. 몸은 고통스러웠고, 일본인들은 쉴 새 없이 내 몸을 망가뜨렸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때 나는 아직 어렸고 일본군은 무섭고 강했습니다.”
시투F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네시아인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이다. 일본군에 의해 부루(buru)섬에 갇혀 성 노예로 고초를 당한 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저 인터뷰는 최근 국내에 번역 발간된 ‘인도네시아의 위안부 이야기’ 109쪽에 실려있다.
인도네시아 여성들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성 노예로 고통을 당했다. 1993년 현지 조사에 따르면, 1,156명이 피해자로 등록했다고 돼 있지만 실상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된 적 없는 알려진 비밀’이라는 책의 지적처럼 그들 중 몇 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는지 등 인도네시아인 위안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일본의 은폐 시도와 인도네시아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사실 충격적이고 슬프고 두렵고 우울한 이야기’라고 시작한다. 이어 일본이 폭압적인 헌병대를 동원해 인도네시아 청소년들에게 학업을 계속 시켜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지역 사회 저 밑까지 전파한 사실을 폭로한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한 13~17세 인도네시아 처녀들이었다. 이들은 수도 자카르타에서 3,000㎞ 가까이 떨어진 술라웨시섬과 파푸아섬 사이 부루섬으로 끌려갔다. 지금은 한 나라지만 당시만 해도 머나먼 나라의 오지로 인식됐다.
피해자들은 선상에서부터 집단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돛에 올라가 바다로 투신하면 끌어올려져 손과 발이 묶인 채 매질을 당했다. 섬으로 끌려간 소녀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자존감마저 처참하게 말살당한 삶을 살다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자문자답한다. ‘어린 처녀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부모의 강요와 일본의 위협 속에서 배를 탔다. 왜 일본의 위협이 두렵나, 당시에도 분명 법이 존재했을 텐데. 대답은 단순명료하다. 일본이 곧 법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임무를 잔인하고 용의주도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강압적으로 수행했다.’
이어 ‘우스운 사실은 일본이 위력을 떨칠 때 그들은 무사도 정신을 인도네시아인, 우리들에게 자랑스럽게 가르쳤는데 정작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무사도 정신에 따라 그 어떤 책임도 용감하게 지겠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일본 정부의 태도를 비꼰다.
저자는 인도네시아 현대문학의 거장 고 프라무디야 아난타 투르(1925~2006)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인생의 절반이 넘는 42년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감시와 가택 연금, 투옥에 시달렸다. 1979년 12월까지 10년 넘게 정치범으로 부루섬에 억류되면서 생존 위안부 200여명을 만났다. 원제 ‘군부 압제 속의 처녀들’은 40년 전 완성됐으나 우리나라에선 이번에 완역됐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저자의 가족과 꾸준히 소통한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장은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선조들의 잘못일 뿐 후대인 자신들의 죄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들 역시 역사의 무거운 죄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역자 김영수 박사는 “이 작은 번역물이 아직도 일본군 성 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와 타당한 보상을 집요하게 거부하고 있는 일본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역사 기록, 효과적인 증빙 자료로 활용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책의 부제는 ‘일본군-그들의 잔악함을 세상에 드러내다’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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