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적도의 한인들] <상> 발견 5년 만에 찾아간 아픔의 현장
화장실 개조 국내언론 첫 공개… 77년前 끌려온 소녀 23명 일본군에 짓밟혀
폐허 된 건물 폭 1.5m 방 빼곡… 현지 주민들은 위안소였다는 사실 몰라
정말 화장실이었다. 아니 화장실로 변해 있었다. 2,000루피아(약 160원)만 내면 누구든 쓸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선을 매몰차게 긋듯, 함께 일렬로 늘어서 썩어가는 19칸 방과 달리 그곳만 푸른 페인트가 칠해지고 멀쩡한 문이 달렸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라고 한다. 다음 해엔 그 옆 방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자초지종을 묻는 외지인에게 주민들은 심드렁했다. 그들은 화장실로 변한 장소가 일본군 위안소였다는 사실을 대개 몰랐고, 안다 한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곳에서 일본군에게 ‘성 노예’로 짓밟혔던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차라리 그렇게라도 단장한 게 나았을까, 나머지 19칸의 면면은 참담했다. 폭 2.5m, 길이 3.6m, 높이 3m의 방들은 쓰레기 더미와 함께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창고로 쓴 듯했다. 돌침대와 침대 안쪽을 가리는 천을 걸어 물체를 고정했을 것으로 보이는 구멍만 양쪽 벽에 두 개씩 남아있었다. 버려진 짐승 우리와 흡사했다. 자물쇠로 잠긴 방도 많았다.
그나마 보존이 잘 돼 있는 오른쪽 끝에서 다섯 번째 방 돌침대 위에는 녹슨 풍로와 전기밥솥, 먼지 수북한 오토바이 헬멧 등이 버려져 있었다. 세월에 짓이겨 손만 대도 부스러지는 벽엔 나무뿌리가 들러붙었고, 바닥엔 눈물을 쥐어짜듯 이끼가 발걸음을 방해했다. 한숨을 쉴 때마다 습하고 역한 냄새가 목구멍을 깨웠다. 침대를 딛고서야 손이 겨우 닿는 폭 0.5m, 길이 1.5m 거미줄투성이 나무 창살로 쏟아지는 적도의 햇살은 너무 눈부셔 징글징글했다. 누군가 가지런하게 남겨둔 추모용 꽃들이 침상 위에 희끗희끗하게 말라붙어있었다.
화장실이 있는 건물 너머엔 폐가(廢家) 두 동이 더 있다. 9칸, 15칸으로 추정된다. 지붕과 벽이 무너진 자리에 수풀이 우거져 떼를 입힌 무덤 같았다. 그나마도 방들의 폭이 1.5m밖에 되지 않아 더 답답해 보였다. 넓은 방이 장교용이었다면, 작은 방은 사병용으로 추정될 뿐이다. 질퍽거리는 통로를 오리 몇 마리가 거닐었다. 적도에 가로누운 인도네시아 중부자바 암바라와. 1942년 일본군에게 끌려와 청춘이 짓밟혔던 소녀들은 이제 자취만 남아있지만, 이곳 위안소 앞에 흐드러지게 핀 분홍 꽃들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오롯이 망자가 산 자를 이 황망한 역사의 현장으로 안내했다. 2014년 인도네시아 동포 신문인 한인포스트의 정선(58) 대표 등이 암바라와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고 정서운(1924~2004) 할머니의 생전 육성을 따라 이곳을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다. 5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발걸음은 뜸해졌다.
주변에 살며 일제 치하 적도의 한인들을 연구하는 이태복(59) 시인과 함께 다시 5년 전 드러났던 정 할머니의 육성 녹음을 좇았다. 할머니는 숨졌지만 할머니의 담담한 한마디 한마디는 그 어떤 기사보다 살아 숨 쉰다. 70여년 전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한 소녀의 용감한 증언의 뼈대에, 조심스럽게 살을 붙이려 한다.
“나는 이제 자카르타에서 내려가지고 자바섬 스마랑이란 데가 있는 기야. 거기를 13명이, 그래 가지고 갔다 아이가. 그래서 그 때사 여기가 일본 땅이 아니고 먼 나라다 하는 걸 알았지.”(정 할머니의 생전 육성)
고인이 끌려온 위안소는 한국에서 5,000㎞ 정도 떨어진 인도네시아 중부자바의 주도(州都) 스마랑 남쪽에 위치한 암바라와(ambarawa)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수도 자카르타로부터 470㎞ 정도 떨어져,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경부고속도로 기준 420㎞)보다 멀다. 자카르타에서 차로 7~9시간이 걸린다. 비행기로는 스마랑 공항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데, 다시 차로 1시간20분가량(50㎞) 더 달려야 닿는다. 해발 1,000m에 이르는 길을 굽이굽이 올라가야 한다.
암바라와는 인도네시아를 350여년간 식민 지배한 네덜란드 요새(성)가 있는 곳으로, 1942년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제는 암바라와 성을 네덜란드를 비롯한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썼다. 위안소 건물은 성 북문 7m 지점에 세 개 동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일본이 급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 8월 부산을 출발해 동남아시아로 향한 일본 선박엔 위안부로 끌려온 고 정서운 할머니 등 150명이 탄 것으로 전해진다. 이 중 자카르타 10명, 암바라와 13명 등 23명의 소녀들이 인도네시아에 배속됐다.
“처음에 인제 저녁에 장교 한 놈 오더라고. 술을 잔뜩 쳐먹고 오는 기라. 그래 뭐 벌벌 떨릴 거 아이가. 열다섯 살(할머니 생년을 감안하면 18세), 거기 간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어렸어. 그래 갖고 이제 강간을 당한 기지. 자꾸 이제 상대 안 하려고 내가 막 발악을 하고 그러니까 아편을 찔러 넣는 기라. 그래 갖고 이리 돼서 그만 중독이 돼 버린 거라.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말도 못해. 줄을 서 가지고 옷도 안 벗고.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아이고.”
소녀들은 3년간 매일 30~50명의 군인들을 상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귀국한 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등진 집에서 홀로 아편을 떼느라 4~5개월 걸렸다고 고백했다. 소녀들에게 아편을 놓고 낙태를 시킨 야전 병원을 수소문했다는 이태복 시인이 위안소로부터 50m 떨어진 건물로 인도했다. 2층 한쪽은 병아리 떼를 키우고 있었다. 집주인 미민(61)씨는 반갑게 외지인을 맞으며 “50년을 살았지만 병원으로 썼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고 말했다. “군인이던 아버지가 살던 장교 관사였다”는 것이다. 위안부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하러 가거든. 병원이 야전 병원이 부대 안에도 있고, 또 따로 큰 데가 있어요. 거기 나가면 인도네시아 원주민들, 그 사람들을 보면 그리 반갑고 그렇더라고. 얼굴이 새까맣거든. 그래도 반갑고 남자들만 보다가 그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솟구치는 기라.”
세월이 너무 흘러 현지 주민들은 저 장면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위나르도(84)씨는 “10세 때인 당시엔 ‘주군 이안푸(jugun ianfuㆍ종군 위안부의 현지 발음)’가 있는지 몰랐는데, 독립한 뒤에 보니까 옆집에 인도네시아 위안부가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성에 군인들만 있었는데 그때 이상하게 가끔 액세서리나 옷 같은 여자들 물건이 물물교환용으로 성 밖으로 나온 걸 떠올리고서야 ‘그게 이안푸 물건이었구나’ 추측만 했다”고 덧붙였다. 고인이 말한 ‘큰 데’는 성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여전히 병원으로 쓰고 있다.
“둘이 죽었다. 고마 개 한 마리 죽으면 갖다 묻어버리듯이 그랬지. 장례식이 어디 있노, 거기서. 금계랍 말라리아약으로 먹는 거 그 약을 40알을 내가 구한 기라. 두 개씩, 세 개씩 한국사람이 군의관이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내가 모아 가지고 그걸 한번에 털어 넣었는데. 그랬는데 그것도 죽는 것도 맘대로 못 죽겠더라. 3일 만에 깨어났다. 같이 있는 사람들이 얘기를. 코로 입으로 귀로 전신에서 피가 쏟아지더래.”
“그리고 나서 우리는 손든(항복한) 줄 몰랐는데, 13명이 가 가지고 3명이 죽었네. 3명 죽고 나머지 10명은 이제 방공호, 그 방공호 하나에 다 들어갈 순 없거든. 몇 명만 데리고 방공호로.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다 매장을 시켜버린 거라. 10명 중에서 그러니까 4명이던가, 3명이던가 방공호에 먼저 들어간 이들은 죽었다.”
고인의 증언을 단순 합산하면 종전 후 13명 중 6, 7명이 살아남았다. 고인을 제외한 5, 6명은 어디로 갔을까. 이태복 시인이 그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다. “1986년쯤 한 한인 사업가 기록에 나와요. 다르요노라는 자바 청년이 누나처럼 함께 살던 한인 여성과 함께 자카르타에 취직하러 왔는데 퇴짜를 당했대요. 뒤에 산이 있고 호수가 있고(암바라와 풍경이 그렇다) 성에서 근무했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그때만 해도 화냥년 정서가 남아서 다 배척했답니다. 암바라와 근처 살라티가로 돌아와 거기서 죽었다고 해요.”
고 정서운 할머니의 증언은 대략 여기까지다. 고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목숨만 부지하고 살자, 목숨만 살면 내 몸을 빼앗아가도 내 마음만은 안 뺏긴다. 그런 정신으로 내가 살았지.”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다. “조국이 힘이 없어 끌려간 것인데, 부끄러우려면 우리를 끌고 간 일본이, 그리고 조국이 부끄러워야지.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태복 시인은 “1년 전에 왔을 때 화장실로 변한 위안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라며 “사비를 털어 표지석이라도 세울까 하다가 인도네시아는 일본 입김이 워낙 센 곳이라 오히려 위안소 건물 전체를 밀어버릴지도 몰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미래는 멀고 당장 현재가 부끄럽다. 이역만리 통한의 현장을 보존할지, 방치할지는 후대인 우리의 몫이다. 취재를 간 날은 위안부 문제로 촉발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경제 보복(2일) 하루 전이었고,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한 날(4일)엔 ‘생존자 20명뿐’이라는 제목 아래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의 부고를 접했다. 기자는 취재하는 동안 밥을 먹지 못했고, 기사를 쓰는 내내 몸이 아팠다.
암바라와(인도네시아)=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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