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7>가장 먼 곳의 독립운동- 멕시코의 동포들
중노동으로 입에 풀칠할지언정, 기꺼이 조국의 독립자금으로 내놓아
낮엔 일하고 밤엔 독립 강연… 안창호 멕시코 순방 10개월에 감화도
독립의연금 모집 중심 김익주 선생, 가게까지 처분하며 최고액 지원
지난달 22일 찾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프로그레소(Progreso)항. 에메랄드 빛 여름 바다가 아름다운 중미의 정취를 자아내는, 한국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머나먼 땅이다.
하지만 이곳은 1920년대 중반부터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간부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절절한 편지가 태평양을 건너 도착 했던 곳 중 하나로 추정된다. 임정 청사 월세도 내지 못하던 비참한 시절, 편지로 나라 잃은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구했던 김구는 백범일지 하권에서 편지정책을 그의 ‘유일한 사무’라고 적었다.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를 아우르는 미주 동포들은 1만여명에 불과했지만, 독립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동북3성에 사는 250여만명의 동포는 사정이 본국과 다르지 않고, 150여만명의 동포가 사는 러시아령은 공산국가라 민족운동을 할 수 없고, 일본에 사는 40만~50여만명의 동포에게도 의뢰할 형편이 안되고…(백범일지).’ 그렇게 주목한 곳이 미주였다. 김구가 편지를 쓰면 임정 동료 엄항섭, 안공근 등이 얻어온 동포들의 주소를 영어로 봉투에 써서 부쳤다.
한국일보는 제74주년 8ㆍ15 광복절을 앞두고, 멕시코와 쿠바를 차례로 찾아 가장 먼 곳에서 독립을 지원했던 현지 동포들의 염원을 연속 2회에 걸쳐 조명한다. 멕시코 한인들은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수입의 20% 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김구의 편지는 찾을 수 없고 후손들은 한국말을 잊었지만 생전 언제나 조국을 그렸던 조부모의 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114년전인 1905년 5월 14일 일요일 오후 3시, 1,033명의 한인들이 낯선 바다 색과 언덕 하나 없이 펼쳐진 미지의 땅에 내렸다. 프로그레소항은 대서양을 바라보며 유카탄의 특산품 에네켄(henequenㆍ선박용 밧줄의 원료로 용설란의 일종이며 한인들은 ‘어저귀’라고 부름) 상품을 수출했고, 100여년전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한국에서 멕시코 유카탄까지 약 1만2,000여km. 지금도 비행기로 17시간 이상이 걸리는 여정이 당시 40여일 가량 걸렸으며, 항해 도중 어린아이 등 3명이 사망했다. 최근 지어졌다는 거대한 교각 옆에 100여년 전 사용됐던 교각이 복구돼 당시 항구 풍경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유카탄의 중심도시 메리다에서 22개 에네켄 농장으로 흩어져 일했던 한인들은 4년간의 농장 계약이 끝난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와중에도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위해 독립자금을 모아 미국으로, 중국으로 보내곤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를 받아 특히 민족의식이 높았던 멕시코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까지 처분해 독립자금을 댔던 김익주(1873~1955)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은 “미주지역 동포들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 결국 (김구 선생이 기획했던) 이봉창, 윤봉길 의거로 이어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백범일지 하권은 김구 선생이 주로 미주와 하와이 동포를 염두에 두고 쓴 일종의 유서”라고 말했다.
◇멕시코를 고취시킨 ‘그란 마에스트로’ 안창호의 숨결
멕시코 한인 사회에서는 아직도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한 존경심과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1909년 설립된 해외 한인동포 조직이자 독립운동 지도기관이었던 ‘대한인 국민회’의 총회장이었던 안창호 선생은 1917년 10월부터 1918년 8월까지 약 10개월간 멕시코 한인사회를 순방했다.
1995년부터 메리다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멕시코 한인 후손들에 대한 연구를 한 조남환 목사는 “멕시코에서 안창호 선생은 ‘그란 마에스트로(Gran Maestro), 위대한 스승’으로 불렸다”며 “멕시코에 온 한인들은 10여년간 지도자 없이 자기들끼리 지내다 미국에서 한인들의 대사관 역할까지 한 대한인 국민회의 회장이 와서는 에네켄 농장에서 함께 일하고 저녁에는 강연을 하며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멕시코에서 모은 독립운동 자금은 사실상 안창호 선생을 보고 모아준 것”이라고 말했다.
도산 선생의 헌신을 보여주는 몇몇 에피소드들도 전해진다.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는 일부 한인들이 에네켄 한 단의 수량을 다 채우지 않는 등 농장주를 속이자, ‘조선 민족과 일하다가는 망친다’며 현지 신용이 떨어졌다. 이에 안창호 선생은 “어저귀(에네켄) 한 단 묶는 것이 곧 나라 일이다”라며 열성으로 지도를 해 근무 태도가 개선되고 농장주들에게 신용이 회복됐다. 또한 당시 한인 어부들의 집집마다 변소가 없는 것을 보고는 안창호 선생은 “동방예의지국 백성으로서 아무리 외국에 나와 어촌생활을 하지만 조상 때부터 가지고 내려오는 예절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변소 만드는 일을 권유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변소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도산 선생이 직접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놀라 합세해 변소를 만들었다(박현환 ‘속편 도산 선생 안창호’, 곽림대 ‘안도산 선생’). 도산 선생의 지도하에 대한인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는 노동규정을 만들고 농장주와 한인 노동자간의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멕시코 한인들은 안창호 선생의 북미실업주식회사 주식 2만여원어치를 사들이고, 흥사단에 가입하기도 했다.
메리다는 프로그레소항에서 35㎞ 가량 떨어져 있고 당시 한인들은 화물열차로 3시간 걸려 도착했다. 지난달 20일 찾은 메리다에서 에네켄 농장은 볼 수 없었다. 멕시코 혁명과 나일론의 등장 등으로 1920년대 에네켄 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지금은 관광용 체험 농장 외에는 에네켄 농장이 운영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도착한 1905년 완성됐다는 대로변을 따라 화려한 유럽풍 저택들(주로 에네켄 농장주 소유)이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고, 프로그레소 항까지 에네켄에서 뽑아낸 섬유로 만든 밧줄 등 수출품을 실어 나르던 기찻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빈털터리가 되도록 독립자금 댄 김익주
멕시코 독립운동의 상징인 김익주 선생의 후손은 멕시코시티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김익주 선생은 대한인 국민회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공로로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지난달 18일 만난 김익주 선생의 손자 아벨 김공(79)씨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하다 정치적 이유로 멕시코로 오게 된 할아버지는 남달리 애국심이 투철하셨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양반 출신으로 육체노동에 소질이 없어 농장에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으며 대신 제주 해녀 출신인 부인 백곤차씨가 농장일을 비롯해 가족 생계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 4년 농장 노동계약이 끝났지만 모은 돈도 없었던 이들 가족은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멕시코시티에서는 화장품 판매를 하고, 1912년 탐피코로 이주한 후에는 멕시코 전통요리를 파는 식당을 운영하며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 2층 건물인 식당은 지붕이 기와 모양으로 멕시코의 전통 건물과는 확연히 달라 지역 명물로 꼽히기도 했다. 김공씨는 “할아버지께서는 식당을 파고다 공원의 정자와 같은 형식을 본 따 지으셨고, 식당 이름도 ‘엘 코레아니또’(작은 한국인)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모처럼 경제적 안정을 줬던 식당을 팔았다. 안창호 선생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독립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탐피코를 방문한 안창호 선생이 김익주 선생을 만났고 둘은 조선의 미래를 열성적으로 논의했다. 안창호 선생이 직접 찍었다는 김익주 선생 가족 소유의 2층 식당 사진에는 태극기가 걸려있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안창호 선생이 할아버지에게 한국이 매우 고통 받고 있지만 조만간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식당까지 처분해 현금으로 만들어 도산 선생에 드렸어요. 당시를 기억하신 아버지(김익주 선생의 차남) 말씀으로는 안창호 선생이 아버지와 투철한 애국심으로 말이 잘 통하셨고, 한국이 지금의 처지를 개선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919년 3ㆍ1운동 소식이 멕시코 한인사회를 들썩이게 한 가운데 김익주 선생은 1919년 5월 대한인 국민회의 파출위원으로 임명돼 인구등록과 독립의연금 모집을 담당했다. 그는 또한 그 해 7월 임시정부에서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하자 가입하기도 했다. 김공씨는 “할아버지는 적십자회에 수표 형태로 정기적으로 돈을 보냈다”고 말했다.
김 선생은 1926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 자녀들이 다니는 인성학교가 재정난에 처해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자 돈을 지원했고, 이후 다시 한번 재산을 처분하기도 했다. 김공씨는 “안창호 선생에게 돈을 드리고 나서 10년 후에도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재산을 처분해 돈을 보내드려 결국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김공씨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한국을 애타게 그리워했는지 기억했다. “할아버지가 한국이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까움에 밥도 못 드셨다는 것이 기억이 납니다. 어렸을 때 일본인 상점에서 물건을 샀다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께 크게 혼나기도 하고, 제가 밥을 남기면 어머니가 ‘한국이 얼마나 어려운데 밥을 남기느냐’며 혼을 내시기도 했고요.”
당시 멕시코 동포들이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 총액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김익주 선생은 멕시코 한인 중 가장 많은 돈을 지원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멕시코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았던 2005년 서동수 이민100주년 기념사업회장은 “김익주 선생이 미주 국민회와 상하이 임시정부에 지원한 돈은 당시 가치로 4,000달러가 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30년 기준 4,000달러는 현재 대략 6만달러(약 7,200만원)의 가치가 있다.
백범일지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멕시코 한인으로 김기창 이종오 선생이 언급돼 있다. 메리다에서 이종오(1869~1946ㆍ건국포장) 선생은 한인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 국민회 본부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이종오 선생의 외증손자 율리시스 박리(79)씨는 “메리다 지방회관에 머물던 안창호 선생은 매일 아침 외증조할아버지 댁을 방문했고, 이종오 선생의 결혼식에 도산 선생이 주례를 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리씨는 “외증조할아버지는 메리다에서 작은 사탕가게에서 일하는 등 입에 간신히 풀칠할 정도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고모(이종오 선생의 손녀)는 당시에 ‘우리들은 여기서 굶고 있는데 왜 돈을 다른 곳에 보낼까’라고 생각하며 미워했다고 한다”며 “모은 액수는 비록 많지 않았지만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한국의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3ㆍ1운동 여파, 조직적 모금으로 이어져
‘한인 300만명으로 조직된 독립단은 예수교회 3000과 천도교회 5000과 각 대학교들과 모든 학교들과 모든 단체들로 조직한 바 3월 1일 11시에 서울과 평양과 및 각 도회에서 한국독립을 선언하고 대표자 손병희 이상재 길선주 제씨를 파송하였소’
3ㆍ1 운동 소식은 3월 9일 상하이의 현순 목사가 안창호 선생에게 친 전보가 대한인 국민회 각 지회로 퍼지면서 멕시코까지 당도했다. 흥분에 들뜬 한인들은 매일 밤 모여 후속대책을 논의했고,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13일 독립의연금을 모으기로 결의하고 지부별 모금을 시작했다. 한 달 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들에게 조세적 성격을 띤 인구세, 자발적 헌금인 애국금, 대내외적인 공채 발매 세 가지를 재정수입의 근간으로 삼기로 했다. 1920년 추가로 국민의 소득비례에 따른 ‘임시소득세’와 외국차관이 재정 확보 수단으로 제시됐다.
멕시코 지역 한인들은 3ㆍ1운동 이전부터도 대한인 국민회의 지역 지부와 경찰소를 설치해 조직화를 꾀했다. 의사 소통의 어려움, 문화적 차이로 생존을 위해 동포끼리 협력했어야 할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멕시코의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식민지 백성으로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한국인 사이의 단결과 보호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대한인 국민회의 관보로 해외 한인들의 소식통이었던 신한민보의 전신 공립신보에 따르면 1908년 12월 일본인이 한국인들이 일하던 산으리, 초촐라 농장 등에 찾아와 “너희는 우리의 보호국 백성이니 내가 너희를 관할하겠다”라고 하자, 한인들이 “매국적 몇 놈이 있어 소위 보호 조약을 하였다 하나 우리 국민은 당당한 독립국 백성이오, 너희 일본은 우리의 역사상 원수라. 우리가 죽을지언정 너희 같은 왜놈의 보호를 받을 리가 있느냐”라고 호통을 치며 내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메리다의 한인 300여명은 에네켄 농장 4년 계약 종료 사흘 전인 1909년 5월 9일 대한인 국민회 메리다 지부를 발족했으며, 이들은 한 사람당 1년 1페소의 인구세를 걷었다. 또 대한인 국민회 총회에 의무금을 내거나 빚을 대신 갚아 주기 위해 돈을 걷어 냈다. 동맹저축, 애국동맹금, 1919년 1월 파리 평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위한 특별의연금으로 한 사람당 20페소이상을 거두기도 했다. 개인이 현금을 내고 그걸 취합해서 보내는 방식이었다.
또 멕시코 이주자 가운데 200여명이 대한제국의 광무군인 출신이었기에 이근영 선생을 중심으로 1909년부터 3곳 농장에서 병법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1910년 메리다에 본격적인 사관양성 기관인 숭무학교를 창설해 3년간 생도 118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일제에 맞서 독립전쟁이 일어나면 언제라도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한인들의 본격적인 독립운동 자금 모금은 3ㆍ1운동 이후 본격화됐다. 신한민보에 따르면 멕시코에서 한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대한인 국민회 메리다 지부에서는 소득의 20분의 1를 독립의연금으로 걷는 ‘21례’를 시행해 메리다의 레굴라도 은행에 입금했다가 환전해서 총회로 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메리다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총회에 보낸 돈은 ‘21례’ 800달러와 인구세 150달러 등 약 1,000여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1917년 12월 기준 메리다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가 총 593명이던 시기였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팀장은 “에네켄 농장 노동자 하루 임금이 약 10페소 정도이던 시절이었다”라며 “각종 명목으로 걷은 돈을 다 합치면 멕시코의 한인들은 수입의 약 20%이상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멕시코시티ㆍ메리다=글ㆍ사진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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