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1905년 멕시코행 배를 탄 조선인들
대한제국 퇴역군인 200명… 8~15세 청년 부랑자들도 수백명
멕시코의 첫 번째 한인 이민자들은 1904년 11월부터 1905년 1월까지 대한일보와 황성신문에 게재된 ‘농부모집’ 광고를 보고 모인 사람들이었다. 유카탄 지역의 특산품인 에네켄 산업이 활황에 접어들며 노동자수가 부족해지자 에네켄 농장주 협회와 유카탄 의회는 해외 노동자 이민을 추진했다. 이민 브로커 존 마이어스가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자 모집을 실패하고 대한제국으로 와 전국 18개 지방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신문 광고를 낸 것이다.
재미역사학자로 2006년 ‘멕시코 한인이민 100년사’를 펴낸 이자경씨의 글에 따르면 이민자의 구성은 대한제국의 퇴역군인이 200명으로 가장 큰 집단을 구성하고 있고 소작인, 잡역부, 전직 하급관리, 소수의 양반계급, 부랑아, 걸인 등으로 다양했다. 대한제국 황실학교 교사였던 이종오 선생은 아들 하나와 동행하면서 내시 3명, 궁녀 1명과 함께 배를 탔다. 이 가운데에는 정확한 숫자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8~15세 사이 부랑아 그룹이 수백 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멕시코 이민자를 모집했던 대륙식민회사 직원의 기록에 따르면 청년 노동자를 원하는 농장주들 측의 요구에 부합하기 힘들어지자 회사 직원들이 동네의 부랑아들을 꾀어 모아 목욕을 시킨 뒤 밥을 먹였다고 나온다. 멕시코 이민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들 상당수가 멕시코로 향하는 배에 탔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모집된 1,033명은 남자 702명, 여자 135명, 아동 196명이며 가족은 257가구였다. 독신 남성 중심의 하와이 이민에 비해 멕시코 이민은 가족이민에 가까웠다. 이들은 1905년 2월 말 인천 제물포항에서 화물선 일포드호(San Ilford)를 탔다가 배 안에 수두가 번지고 여권 문제로 출항이 미뤄지다 4월 초가 되어서야 멕시코를 향해 출발했다. 이후 계약 노동 이민이 금지돼 멕시코 에네켄 이민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멕시코에서 힘겨운 4년 계약이 끝나고 이들 대부분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멕시코 각지로 흩어졌다. 청년들은 언어를 익히고 멕시코 여성과 결혼해 멕시코 사회에 적극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메리다의 대한인 국민회 지방회관을 개조해 2005년 문을 연 한국이민기념박물관의 돌로레스 가르시아(59) 관장의 할아버지 김수봉씨가 바로 이런 경우다. 8세에 아버지 김수원씨와 함께 멕시코로 건너 온 김수봉(수사노 가르시아)씨는 메리다 인근 첸체 농장에서 힘겨운 아동 노동을 하던 와중에도 마야어와 스페인어를 익혀 말을 타고 농장을 점검하는 십장 격인 ‘까빠다스’가 됐다. 멕시코 여성과 결혼한 그는 대부분의 한인이 농장을 떠난 1940년 농장이 아예 문을 닫을 때까지 30여년간 일했고, 이후 메리다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가르시아 관장은 “메리다 시내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술집에서 술을 많이 드시던 할아버지를 모셔 오는 것이 우리 손자들의 일이었다”며 “손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할아버지는 ‘까사(Casa)’는 한국말로 ‘집’이라고 알려주시기도 했고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글ㆍ사진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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